떠나기 때문에 온전히 느낄 수 있던 순간
이른 새벽,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아빠와 함께 공항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2월 후반의 새벽 공기는 차지만 나름 괜찮은 공기였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 한 대가 재빨리 뒤꽁무니를 보이며 출발해버렸다. 하는 수 없이 다음 버스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 사이, 아빠와 나 둘 밖에 없던 정류장에는 나처럼 어딘가로 떠나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인천행 버스가 도착해 한 차례 사람들을 싣고 떠난 후, 머지않아 기다리던 김포행 버스가 도착했다. 이제 정말 떠날 때였다. 이제 정말 '나홀로'였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연락해야 돼!"
벌써 다섯 손가락이 넘을 만큼 들은 거 같다. 떠남에 대한 싱숭생숭한 내 마음처럼 아빠 또한 마찬가지였나 보다. 아마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먹고, 즐기고. 그렇게 한껏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과 걱정 어린 마음이 뒤섞였으리라 생각된다. (그치 아빠?)
그도 그럴 것이 유럽은 커녕 한국 땅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쥐방울만한 딸이, 옆 동네로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혼자 유럽을 다녀오겠다고 하니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걱정 말라는 듯, 괜히 더 무심한 척 웃으며 인사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드디어 나홀로 여행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한참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창 밖의 가로등 불빛들이 스쳐 지나가는걸 보고 있으니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태어나 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사실 떠나기 전, 여행 디데이가 다가올수록 마냥 설레고 좋기만한건 아니었다. 조금 뜬금 없지만 나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 하자면, 나는 4년 동안 '복수전공자'라는 타이틀과 함께 학사과정을 스트레이트로 마쳤다. 그리고 곧바로 국가고시 준비를 했고, 국시를 치른 후 졸업식을 맞았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상반기 채용 시기는 지났을게 뻔했고, 가까운 미래는 불투명했다. 부모님은 사시사철 일만 하느라 해외여행은 커녕 국내여행 조차 못 다니는데, 동기가 어찌됐던 나 혼자 여행을 떠난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시기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여러 가지로 과연 내가 지금 떠나도 괜찮은 걸까? 수십 번 아니 수백번은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떠나야 했던, 나를 떠나게 만든 동기는 이러했다.
메모장 2014년 11월 6일 오후 10:08
유럽 배낭여행 동기
1. 고등학교 때부터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2. 대학 4년 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최선을 다 한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 (쉼)
3. 새로운 경험과 도전을 하고 싶다.
4.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다.
5.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머리로만 그리는 게 아니라 직접 실천하고 그런 삶을 살아내고 싶다.
(나에게 이상적인 삶이란, 나이를 먹었으니 취업하고, 결혼하고, 남들 다 하니깐, 그냥 물 흘러가듯 당연히 때가 되니 해야지 라는 식의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나 스스로가 진짜 행복하다 느끼는 삶이 되고 싶고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꿈꾸는 것들을 실현하고 싶다. 욕심과는 다른 비전의 개념에서.
그리고 이십 대 청춘일 때 조금이라도 더 도전하고 경험하고 싶다.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도, 기다려주지도 않으니깐)
어찌 보면 젊은 시절의 패기 정도로 볼 수도 있지만, 고민 속에서 한참 여행을 준비하던 2014년 11월 6일의 나에겐 이 사회가 요구하는 짜여진 공식 같은 삶이 아닌 '나'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작은 용기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 그거면 충분했다.
조금 촌스럽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내가 비행기를 타 본 경험이라고는 부모님의 신혼여행에 덤으로 딸려 갔던, 기억도 나지 않는 갓난아기 때, 그리고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모두 제주도를 가기 위한 비행이었다.
나에게 일주일 그 이상으로 떠나는 '나홀로 여행'이라는 것도, 대한민국 이외의 다른 어딘가로 떠나는 것도, 심지어 공항 리무진을 타는 것도, 혼자서 공항 수속을 밟는 것도 전부 처음 경험하는 일이자 작지 않은 도전이었다.
인간은 무언가 새로운 경험 앞에 두려움이라는 걸 갖는다는데, 정말 그랬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비행기를 놓치는 꿈을 두 번이나 꿨는데, 지금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나홀로 여행이라는 도전 앞에 걱정과 두려움을 안고 있었던 것 같다.
나의 불편한 감정과는 상관없이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는 계속 달렸고, 이른 새벽은 고요했다.
핸드폰을 만지작 만지작 하다가 한 여행 관련 사이트에 나의 뒤숭숭한 기분을 적어 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올린 글에 댓글이 달렸다. 그 댓글을 읽고 나니 비로소 뒤숭숭한 나의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버스 안에서 메모한 글이다.
공항 가는 버스 안.
"그 때가 제일 설레잖아요."라는 누군가의 말.
그래, 걱정과 불안, 기대와 설렘이 섞인 이 편치만은 않은 감정도 내가 떠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거겠지.
떠나지 않았다면 느끼지도, 경험하지도 못할 감정.
즐기자 :)
떠난다는건 그런 거 아닐까?
(왼쪽) 여행 다이어리에 적어 놨던 명언.
매일 다이어리를 적을 때 마다 보고 또 보며 때로 마음을 다 잡기도 하고, 때로는 명언에 큰 공감을 하기도 했다.
(오른쪽) 여행 버킷리스트.
여행 버킷리스트에 빨간 볼펜으로 쫙-쫙 줄을 긋는 순간은 꽤나 짜릿했다.
그렇게 나만의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