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되는 것'에서 '하고 싶은 것'이 되던 순간
베이징에서 무사히 경유를 마친 후, 약간의 대기시간 끝에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나는 첫 국제선 탑승의 설렘을 안고 비행의 로망인 창가 쪽 자리를 미리 예약해 놓았다.
내 자리를 찾았을 때, 옆자리에는 한 아주머니가 앉아 계셨다.
"Excuse me"
아주머니를 향해 한껏 미소를 띠며 내가 저 창가 자리에 앉을 사람이라는 걸 알렸다.
아주머니는 벌떡 일어나 내가 자리에 들어가도록 비켜주셨다.
그리고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와 함께 '나는 네게 질문을 하고 있어'라는 표정의 아주머니 얼굴을 마주했다.
짐작컨데, 영국에 어떤 이유로 가는 거냐, 혼자 가는 거냐 뭐 이런 질문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때의 뉘앙스는 그러했다.
나는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그저 웃었다.
그제야 아주머니는 내가 중국인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영어로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며 미안하다고, 내가 중국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짧은 통성명을 했고, 각자 다른 이유였지만 혼자서 떠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길이라고 하셨다.
굳이 영어를 공부하러 혼자 런던까지 떠나게 된 이유나 여러 가지 배경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다행이라 생각한건 첫째,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다.
둘째, 배려심 있고 착한 분인 거 같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렇게 만국 공용어 영어로 10시간이 넘는 비행 속에서 심심치 않게 대화를 나누며 런던으로 조금씩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기내식을 먹고 한참 영화 의뢰인을 보다가, 졸다가, 보다가, 졸다가를 반복하며 좀이 쑤시는 것 같다고 느낄 때쯤, 갑자기 두 명의 승무원이 다가왔다.
"Are you Korean?"
갑작스런 질문에 눈이 동그래져 그렇다고 대답하니, 혹시 다른 한국인 승객 좀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조금, 아니 조금 많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중국어는커녕 영어도 완전 젬병인걸? 그런데 무슨 도움이 필요한 거지?
짧은 찰나 여러 생각이 스쳤지만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은 "Okay".
그래, 한국인이 도움이 필요하다니깐 뭔지는 몰라도 일단 가보자.
승무원들을 따라 내 자리에서 꽤 떨어진 앞자리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승무원 한 명이 더 있었고, 좌석에 한 여자분이 얼굴이 창백해져 식은땀을 흘리며 앉아 계셨다.
딱 봐도 어딘가 아파 보이는 얼굴이었다.
승무원들은 이 승객이 아픈 것 같은데 어디가 아픈 건지 통역을 해주길 원했다.
몸을 낮추어 그 분께 어디가 아프시냐고 물으니 그 분은 아까 기내식을 먹은 후 마신 맥주가 잘못된 거 같다고 했다.
아, 누가 봐도 이건 체한 증상이었다.
승무원들에게 맥주를 마신 후부터 아픈 거 같다고 전하고 혹시 약 같은 거 없냐고 물었다. 승무원은 자신들이 이 승객의 증상을 확실히 몰라 약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이 사람은 그냥 체한 거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소화제 한 알이면 금방 괜찮아질 거 같은데, 그런데 소화제가 영어로 뭐냐고!!!
도저히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소화제가 영어로 뭐야?
그렇게 서로가 답답해하는 동안 다른 승무원이 의사라는 한 서양 남자를 데리고 왔다.
나는 모든 상황을 그 의사라는 사람에게 넘겨주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이어리를 펼쳐 적었다.
'영어 공부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
사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적지 않게 공감할 거다.
대부분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 고등학교까지 필수과목으로 영어를 배운다.
대충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 까지라고 해도 어언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럼에도 정작 외국인이 말이라도 걸면 긴장하고, 버벅이는 게 우리들의 현실이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이러한 모순에 공감할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 사람들 중 토익(Toeic)은 만점에 조금 못 미치는 점수임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대화는 전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나 또한 학창시절, 해당 시험 범위의 교과서만 달달 외우는 점수 따기 식의 영어 공부를 해 왔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2학년 때까지 필수 교양으로 들어야 했던 영어 수업을 끝으로 영어는 나와 아주 거리가 먼 '외국어'가 되어 버렸다.
나에게 영어란 그저 해야 되니까 하는 시험 과목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겼던 영어가,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아주 절실히 나와 상관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 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영어라는 게 여행의 질을 얼마나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인지 말이다. (적어도 내가 원하는 여행 스타일에 있어서 영어는 꽤 중요했다.)
그리고 이제 영어라는 한 언어는 내게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이 되었다.
하고 싶다. 정말로-!
창 밖에 구름이 걷히고 굵은 템즈강과 런던아이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기내 안에서는 여기 저기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사진으로 모두 담을 수 없는 그 때의 설렘과 아름다움은 잊지 못할 거다.
'아, 내가 진짜 영국에 왔구나.' 싶었던 순간.
여행하는 동안 수많았던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