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런더너를 처음 만난 순간
김포, 베이징을 거쳐 10시간이 넘는 긴 비행 끝에 드디어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
드디어 내가 런던에 도착했다는 설렘과 동시에 숙소까지의 여정에 대한 긴장감이 공존했다.
런던 히드로 공항은 입국 심사가 아주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다.
여행을 준비할 때 그런 이야기를 하도 들은 터라 미리 숙소며, 각종 바우처들을 프린트해서 가방에 넣어 놓았다.
입국 심사 후기들을 보면서 대부분 어떤 종류의 질문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대충 알아놓고 그야말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만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의심받지는 않을 거 같고.
자, 이제 1:1 영어 회화 테스트만 무사히 넘기면 된다.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런던에 무사 입성 소식을 전하는 사이, 점점 나의 차례가 다가왔다.
'제발 남자한테 걸려라, 남자한테 걸려라.'
후기에서 본 바에 의하면 상대적으로 남자 직원이 간단한 질문만 하고 보내주는 편이라고 했다. 당연히 남자 직원에게 걸리길 간절히 빌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할 수는 없었다. 창구가 비는 곳으로 순차적으로 가야 하는 시스템, 그야말로 복불복이었다.
드디어 나의 차례.
"Go to number 6"
6번 창구에 당첨되었다.
맙소사. 백인 여성이었다.
"Hello"
최대한 '난 테러고 뭐고 전혀 관계없는 그냥 런던에 처음 여행 온 사람이에요.'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한 껏 미소를 띠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도 나만큼은 아니지만, 직원은 미세하게나마 미소를 띠며 인사를 해주었다.
그리고 뒤이어 폭풍 질문 공격을 받았다.
몇 살이니, 며칠 동안 런던에 머무니, 어느 숙소에 묵니,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니, 대학생이니, 몇 년 동안 배우는 과정이니, 이제 얼마나 남았니, 지금 홀리데이 기간이니, 언제 까지니, 런던에서 바로 집으로 가니, 보딩패스 있니, 보여줄 수 있니, 돈은 얼마나 가지고 있니
당시에는 하도 긴장을 하고 있던 터라 질문이 많은 건지도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엄청난 질문 어택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영어 젬병인 내가 직원이 묻는 질문들이 다 귀에 들어왔고, 내 입에서 영어로 대답이 술술 나왔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더니. 정말 정신을 단디 차리니, 영어도 들리고 말도 술술 나왔다.
10여 년 동안 한국에서 받은 영어 교육이 아주 쓸모없진 않나 보다.
그렇게 무사히 한 고비를 넘기고, 이제 숙소까지 잘 찾아가는 일만 남았다.
수화물을 찾은 후 튜브(영국 지하철)를 타러 내려가 창구에서 오이스터 카드(교통카드)에 탑업을 했다.
그리고 난생 처음 튜브를 탔다.
세계 최초로 지하철이 생긴 곳? 바로 영국이다.
한국보다 무려 100여년 먼저 생긴 영국의 튜브는 11개의 노선이 있어 런던 안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지 못하는 곳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영국의 지하철은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굉장히 아담하다. 앞사람과의 거리도 훨씬 가까워서, 조금 체격이 있는 남자끼리 마주 앉아 있을 때는 다리가 다을랑 말랑 할 정도이다. 한국 지하철에 익숙해져 있는 나에겐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약간의 긴장과 함께 미리 알아놓은 루트대로 한 번의 환승을 거친 후, Oxford Circus역에 내렸다.
아, 이때는 몰랐다. 유럽여행 내내 도시와 도시를 이동하면서 캐리어를 들고 얼마나 고군분투할지.(유럽 지하철 내에는 한국과 달리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곳이 많았다. 고로, 혼자 캐리어를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해야 했다.)
Oxford Circus역에서 내려 바깥으로 나왔던 순간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크리스마스날 명동'이었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바글바글했다.
런던에 적응이 될 쯤에야 이 정신없는 Oxford street이 마음에 쏙 들었지만, 처음 도착했을 때 나에겐 혼자서 무거운 캐리어를 질질 끌며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 감각도 상실한 채,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외롭디 외로웠으며 조금 서럽기까지 했다.
역에서부터 숙소까지 찾아가는 길을 프린트까지 해 왔는데, 막상 역에서 나오니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야말로 대혼란이었다.
구글맵을 봐야 하는데 데이터도, 와이파이도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 핸드폰 배터리도 8% 밖에 남지 않은 상태.
어찌 됐던 길바닥에서 밤을 지샐 수는 없으니, 어떻게 해서라도 숙소까지 찾아가야 했다.
한참 캐리어를 질질 끌며 두리번 거리다가 구석에 자전거를 세워 놓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저 사람한테 물어보자.
쪼르르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Excuse me, Do you know YHA Central Hostel?"
"Sorry?"
자전거를 세우다 갑작스런 내 질문에 잠시 하던걸 멈추고 나에게 되물었다. 가까이서 보니 할리우드 배우 잭 에프론의 전성기 시절과 매우 닮은 남자였다.
그런데 내 발음이 구린건지, 그 남자는 쓰고 있던 비니까지 귀에서 젖히며 가까이 다가와 세 번이나 더 물었다.
나는 최대한 발음을 굴려 "Y.H.A. Central. Hostel"이라고 또박 또박 말했다.
그제야 알아들은 남자는 "구글맵에 찾아보면 나올걸?"이라고 답했다.
"But I have a no battery"
" Ooooh"
그제야 나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그 남자는 자신의 핸드폰으로 구글맵에 호스텔을 검색해 주었다. 그리고는 엄청 자세하고 친절히 숙소까지 가는 길을 설명해 주었다.
옆에 있던 환경 미화원 아저씨가 계속 쳐다보면서 왜 아빠 미소를 짓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잭 에프론을 닮은 런더너의 설명을 듣고 호스텔을 바로 찾진 못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혹시 연예인 아니야? 싶을 만큼 잘생겼더랬다.(땡큐 잭)
이후로도 Oxford Sreet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Do you know YHA Central Hostel?"이라고 수없이 물었고, 덕분에 런던 도착 첫 날부터 정말 다양하고 친절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여를 헤매다가 기적처럼 배터리 1%를 남기고 겨우 숙소를 찾았다.
무사히 체크인을 마치고, 원래 예약했던 6인실에서 4인실로 업그레이드를 받아 룸에 들어갔다.(비수기 여행의 메리트이다.)
긴 비행과 숙소 찾아 삼만리 여정 덕분에 내 모습은 그야말로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냥 즐거웠다. 기내에서부터 런던에 도착해서 까지 여행 초반 부터 일어난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 모두 그저 즐거웠다.
왜냐고? 나는 지금 런던이니깐! 뭐가 문제야!
자다가 "Do you know YHA Central Hostel?"이라고 잠꼬대만 하지 않으면 괜찮을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