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시간이 지나고 존재가 희미해지면 그 때 그 향기는 더욱 짙어지고, 치이고 무너지는 하루를 살아갈 때, 그 때를 회상하며 살아갈 이유를 만나고 넘어져도 애써 일어났다. 오래 살았던 동네를 한참 만에 다시 가보면 그곳이 정처 없이 휘몰아치는 삶 속에서 마음을 놓이고 한 숨 쉴 수 있는 곳이라는 걸 깨닫는다. 퇴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길에 놓여진 푸른 나무들이 흔들리는 모습과 흰 시멘트벽에 오롯이 남겨지는 그림자를 보며, 바삐 움직이고 새로운 것을 쫓고 쉬이 지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이처럼 자생하며 자연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것들이 나에게 넉넉한 위로와 힘이 되곤 했다. 내게 반포라는 곳은 단지 거주지가 아닌 내가 의지하던 곳, 나의 고향, 언제고 돌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처음 이 곳으로 이사를 올 때는 이렇게나 짙게 기억될 줄 몰랐다.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가며 적응해야 했다. 비교적 말랑말랑한 때인지라 새 학교, 새 집, 새 동네에 적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 해가 다르게 뒤섞이는 가치관과 생각들이 거처가면서 인생의 첫. 사춘기가 왔다. 그땐 하고 싶은 것이 어찌나 많았는지, 하나하나씩 읊으며 부모님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친구 따라 강남도 가고, 밤늦게 친구들과 만나서 뛰놀곤 했지만, 학원은 빠지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거나 누군가를 실망시키거나 부모님을 배반하는 것은 나에게 가장 무섭고 커다란 것이었다. 그때 나는 꽤 자유로웠다고 생각했는데, 맏이기도 하고 생각보다 엄격하셨던 부모님 때문에 무거운 책임감이 먼저 다가왔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남들에게 별 일 아닌 일도 나에겐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겁이 쌓여 가출을 하겠다고 3시간을 동네를 방황하다 슬그머니 집에 들어가기도 했고, 5년간 미술입시를 하다가 대학을 가지 않고 해외로 나가 살겠다는 둥.. 이런 모습이 부모님에게는 그저 철부지 딸이 겪는 사춘기로 비춰졌을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몰아칠 때면 괜히 밖으로 나가 동네를 산책하거나 한강으로 뛰쳐나가곤 했는데 그렇게 걷다보면 날뛰는 마음과 여러 잡념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마음이 환기되었다.
그렇게 전쟁 같은 한 때를 보내며 나는 이곳에 있었다.
여름이 되면 그물망에 붙은 매미가 소식을 알렸다. 가을이 오면 쿰쿰한 은행냄새가 동네를 덮었고, 겨울에는 조용히 내리는 창밖의 설경을 액자삼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했던 곳.
내 인생의 절반을 보낸 곳..
그곳이 사라졌다. 누구나 상실을 겪지만 공간이 주는 기억을 더는 소환할 수 없다는 것이 더없이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