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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먼트그래퍼 Apr 16. 2022

곧 죽어도 미술관은 직관

모작 화가의 푸른 붓질 라이브

90년대 초 어린 시절, EBS 교육방송 미술영역(?) 일타강사의 수업을 기다리며 TV 앞 방구석 1열을 자처하곤 했다. 바로 뽀글뽀글 폭탄머리, 푸근한 미소, 무심한 듯한 붓질의 주인공인 밥 아저씨의 그림 그리기 수업에 빠져 드는 시간이다. 최근 MZ세대에게도 유튜브를 통해 역주행하며 다시 유명해진 그 밥 로스 아저씨 말이다. 하얀 캔버스에 쓱 그의 붓질이 지나가면 어느새 눈앞에 요술을 부린 것 마냥 뚝딱 기막힌 풍경이 나타난다.

밥 아저씨는 중독성 강한 “참~ 쉽죠?”라는 멘트를 연신 날리며 누구나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준다. 요즘 시대였다면 족집게 강사로 대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부터였을까. 예체능 중 체육활동에는 젬병이었지만 미술과 음악만큼은 재능이 있든 없든 직접 겪어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 번은 학창 시절 미술수업 중 유화를 처음 접했던 때다. 덧칠의 묘미에 빠져 밥 아저씨처럼 마음 가는 대로 거침없이 붓질을 시도하고 있는데, 미술지도를 하며 주위를 둘러보시던 선생님이 내 그림을 가리키며 뜻밖의 칭찬 한마디를 건네신다.

“색감 표현이 좋네. 다들 한 번 와서 봐봐”  

솔직히 어떤 점이 좋은지 나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우쭐해져서 어깨를 으쓱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때뿐만 아니라, 직접 그림을 그리든, 작품을 감상할 때든 왜 마음에 드는지, 무엇이 좋은지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을 때가 적잖이 많다. 이유 없이 그냥 좋은 것, 보는 대로 그저 즐길 수 있는 것이 내겐 바로 미술이었다. 흥미는 높았지만, 재능까지는 신께서 허락하지 않았던지라 자라면서 직접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자연스레 전시회 관람 놀이로 이어졌다. 캔버스를 채운 조화로운 구도나 색감을 발견할 때 찾아오는 즐거움은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낼 때 느끼는 짜릿한 쾌감만큼이나 크게 다가왔다.

그러다 보니 여행을 떠나면 그 지역의 미술관을 둘러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 요즘은 방구석에서 인터넷만 된다면 구글 아트 프로젝트에 접속해 쉽게 세계 유명한 미술관 작품들을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관람할 수 있지만, 직접 실물 작품을 접하는 것하곤 분명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편리함과 효율성을 갖춘 랜선 투어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서는 더 적합할지 모르겠지만, 다채롭고 폭넓은 경험을 선사하는 미술관 방문 투어의 매력을 여전히 포기할 수 없다.

사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는데 미술관만 한 장소가 또 어디 있을지. 전시 관람 목적만이 아니더라도 미술관 자체 건물과 공간이 주는 매력과 그 공간으로 걸어 들어가서 느껴지는 여유로움은 충분히 그 자체가 여행이 된다. 운 좋게 관람객이 많지 않을 때는 미술관을 전세 낸 것 마냥 있어 보이는 사치를 부려 볼 수도 있다. 루브르 박물관처럼 궁전을 거니는 산책을 하기도, 기차역을 개조한 오르세 미술관에선 미술관 장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경험하기도 하니까. 간혹 유명세가 없는 작은 미술관에 들어갔다가 대단할 것은 없지만 왠지 내게만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우연히 만나 위로를 받기도 한다.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쉽게 접할 수 없는 알짜정보들을 생생하게 들려주는 도슨트 투어 참여는 말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알만한 유명 미술관부터 이름 모를 작은 미술관까지 수많은 미술관이 곳곳에  널려있는 유럽은 그야말로 최고의 여행지다. 그중 파리 여행에서 미술관을 직접 방문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겨났다.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 2층으로 들어서자 프랑스와 이탈리아 작품들이 16세기 르네상스 세상 속으로 내 손을 잡아끈다. 미로 같은 거대한 루브르는 봐도 봐도 끝이 없을 정도로 빛나는 보물들을 내어놓기 바쁘다. 마르지 않는 화수분인 셈이다. 르네상스 시대 거장 중 하나인 라파엘로 역시 질 수 없는 세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바통을 이어받아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신비하고도 성스러운 순간을 그려낸다.

르네상스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여정 속에 갑자기 전시실에 낯선 존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대작 앞에서 당당히 이젤과 캔버스를 세워두고 거침없이 붓질을 하며 작품 그대로를 복사하는 화가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모작 화가들은 주변 관람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자신의 작업실에서 혼자 일하듯 붓질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명작을 연습해보는 기회를 주는 마음씨 좋은 루브르 박물관 덕에 원작과 모작을 비교해보는 관전의 재미가 찾아온다. 원작을 코앞에 두고 실시간 모작하는 화가들의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볼 수 있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스포츠 경기는 직관, 예능은 리얼 관찰 예능이 찐 인 것처럼 라이브는 색다른 감동을 주는 묘미가 있다.

그중 라파엘로의 그림을 모작하는 하얀 백발의 화가가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캔버스 속 중앙 붉은 옷 위에 파란 망토를 걸친 아리따운 여인은 당연 성모 마리아다. 때마침 화가는 성모 마리아를 그리고 있다.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파란 망토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전반적으로 배경이 어두운 톤이지만 망토의 선명한 주름이 파란색의 존재감을 더 부각시킨다. 화가 역시 라파엘로가 빙의한 듯 우아한 성모 마리아의 아름다움과 모성을 그려내고 있었다. 다만, 완성된 상태가 아닐 수도 있지만 모작의 디테일이 아쉽다고 느껴졌다. 허가를 받아야 전시실 내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에 루브르 박물관 모작 화가에 대한 내 기대치가 높을 수 밖에. 성모 마리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망토만큼은 고스란히 살려내길 숨죽여 지켜보았다. 과연 그녀만의 라파엘로의 ‘성 가족’ 은 어떻게 표현될지 시간만 허락한다면 마지막 붓터치를 끝내는 순간까지 곁을 지키고 싶었다.

모사는 단순히 컨트롤 씨와 브이의 복사하여 붙여 넣기와는 다르다. 화가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또 하나의 창조의 과정일 것이다. 어떤 작품을 모사할 것인지부터 시작해 작품을 어떻게 재해석할지 매 붓질마다 고민과 선택의 순간이 찾아올 듯하다. 생각해보면 미술이란 어쩌면 나만의 스타일, 취향을 만들어가는 그런 것이지 않나.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알랭 드 보통 작가의 문구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소유욕을 달래기 위해 붓질 대신 나는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늘 카메라의 손을 빌리는 것은 아니다. 간혹 직접 마음에 드는 풍경이나 모작 화가처럼 따라 하기 쉬운 명작을 선택해 스케치하고 물감으로 색을 입히기도 한다. 하얀 종이 위에 그리고 색을 칠하다 보면 어느새 나만의 의미 있는 뚜렷한 기억으로 각인된다. 쉽게 휘발되어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순간을 오래도록 간직하는 방법으로 그림 그리기는 꽤 즐거운 놀이가 된다. 화가처럼 못 그려도 괜찮다. 놀이는 잘할 필요 없이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 우리는 어린 시절 틈만 나면 벽이든 방바닥이든 그림을 그리며 놀던 DNA를 갖고 있다. 다음 전시 방으로 이동하니 바닥에 앉아 자유롭게 스케치하는 어린아이들이 그 유전자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었다. 모사만큼 미술교육의 기본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또 어디 있으랴. 반 고흐 조차도 밀레를 존경하며 수많은 그의 그림을 모사했을 정도.

이렇듯 미술관이 존재해야 하는 다양한 이유를 다시금 상기시키게 된다. 특히 21세기 현대 미술은 더더욱 관람객이 감상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의 한 구성 요소로서 관람객 자체가 작품이 되는 신박한 경험까지 선사해주는데 미술관 직관을 어찌 마다하랴. 때론 미술이 장난감인 놀이터, 때론 취향 발전소, 때론 느긋한 여행자의 안식처, 때론 예술 실험실인 이 매력적인 공간의 미래를 전통방식으로 여전히 향휴하고 싶다. 누군가는 시대가 변하고 언택트 시대에 맞게 미술관도 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곧 죽어도, 미술관에 발을 직접 들여놓아야 직성이 풀리고 마는 그런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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