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e My Stomach Great Again!

스테이크하우스, 에그슬럿, 인앤아웃까지 칼로리 폭격의 미국 여행

by 모먼트그래퍼

미국 땅을 밟았으면 스테이크 한 번은 제대로 썰어줘야 한다.

본토의 스테이크하우스에서 압도적인 가성비로 만나는 전통 스테이크는

선택이 아닌, 미국 여행의 국룰이다.

주문을 받으러 우리 테이블 담당 서버인 제이슨(Jason)이 등판했다. 정장에 넥타이까지 갖춰 입은 격식 있는 차림이었지만, MBTI를 물어보지 않아도 파워 E임이 분명한 그의 에너지는 그 옷 속에 가둬질 수준이 아니었다. 손짓, 몸짓, 목소리 모든 곳에서 범상치 않은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2인분에 가까운 400g의 거대한 14온스(Oz) 뉴욕 스트립 스테이크가 위풍당당하게 내 앞에 놓였다. 선홍빛 단면과 두툼한 육질이 시선을 묵직하게 잡아끌 때, 나는 포크를 들고 제이슨의 활기찬 에너지에 화답하듯 트럼프 대통령의 유명한 정치 슬로건을 떠올리며 내 위장에게 선언했다.


"Make My Stomach Great Again!"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육즙이 입안에서 팡팡 폭죽을 터트렸다. 그 순간만큼은 위장의 자존심이 한껏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마치 오랜만에 전성기를 되찾은 듯 스테이크의 폭발적인 맛과 양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 위장은 정말로 다시 위대해지는 중이었다.

제이슨은 접시가 비워질 때까지 수시로 다가와

“Is everything ok?”, “Enjoying the meal?”

말을 건네며 나의 위장 행복 지수를 연신 체크했다. 그는 마치 본인이 직접 구운 것처럼 뿌듯한 표정으로 엄지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의 친절함과 밝은 미소 뒤에 팁을 잊지 말아 달라는 자본주의적 메시지가 숨어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떠랴. 적어도 이 식탁 위에서 그는 내 위장이 위대해지는 과정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가장 든든한 조력자였으니까.


전날 밤 스테이크로 전성기를 되찾은 내 위장에게 미국의 식탁은 결코 자비롭지 않았다. 그 자비 없는 공세는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브런치 식당, 에그슬럿(Eggslut)의 페어팩스(Fairfax)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푸드트럭의 전설에서 시작해 미국의 아침을 평정한 에그슬럿. 그중에서도 페어팩스는 달걀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화려하고 기름진 사치였다.

전날 썰었던 14온스의 고기가 강경파였다면, 진한 버터의 풍미가 가득한 브리오슈 번 사이로 흘러넘치는 몽글몽글한 스크램블 에그와 꾸덕한 치즈는 온건파의 탈을 쓴 또 다른 공세였다. 미국의 아침은 이렇게 친절한 얼굴로 찾아와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이 정도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 이제 미국 음식 감 잡았지?”

부드럽고, 고소하고, 묘하게 느끼한 이 조합은 전날의 육즙 폭격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밀고 들어왔다. 이건 연습도, 워밍업도 아니고 그냥 미국식 식사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렇게 아침 식사를 하고 숙소에 들어와 거울을 보니 얼굴에서 번지르르한 육즙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삼시세끼 혈관을 위협하는 식단에 적응을 시작하던 순간, 내 위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 생명력 넘치는 신선한 초록색 이파리 좀 넣어주면 안 될까.”


그때 요즘 SNS를 떠돌던 발칙한 정치 밈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바로 T.A.C.O.

Trump Always Chickens Out.

트럼프 대통령이 결정적인 순간에 꽁무니를 뺀다는 비아냥 섞인 조롱의 약자다. 강하게 밀어붙이다가도 슬쩍 발을 빼는 그 패턴. 생각해보니 지금 내 꼴이 딱 그랬다. 스테이크로 정면 돌파하고 에그슬럿으로 기세 좋게 밀어붙이더니, 이제 와서 밀려드는 칼로리 공포 앞에 슬그머니 초록색 평화 협정을 구걸하는 꼴이었다. 방금까지의 호기는 어디 가고, 혈관의 안부를 물으며 채소 뒤로 숨으려 하다니.



나는 스테이크와 버거의 직진 코스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마침 목적지로 향하던 길목에서 찾은 간판 하나.

Tacos El Gordo(타코스 엘 고르도)

구글 평점 4.3점, 현지인과 관광객이 뒤섞여 늘 줄이 늘어서는, 이미 검증이 끝난 타코집이었다.

정치적 결단은 복잡해도 한 끼의 결단은 명확했다.

"오늘 점심은 타코! 레고레고~"


현지 타코 맛집에 들어서니 스테이크하우스 같은 무거운 공기와는 차원이 다른 역동적인 에너지가 느껴졌다. 가게 안은 정돈된 식당이라기보다 잘 돌아가는 타코 공장에 가까웠다.

카운터마다 고기 종류가 나뉘어 있고, 사람들은 각자 원하는 고기 앞에서 줄을 섰다.

스페인어 메뉴판, 북적북적 오픈키친의 활기, 그리고 묘하게 질서정연한 혼돈.

우리는 고민 끝에 고기종류는 아사다(asada)를 골랐다. 양념으로 유혹하지 않고, 불과 고기만으로 승부하는 방식. 기름진 식단에 놀란 위장이 원하던 답안지는 바로 이런 단순함이었다.

철판 위에서 담백하게 구워진 소고기가 잘게 썰려 토르티야 위에 올라가고, 그 위에 과카몰리, 살사소스와 싱싱한 고수가 얹혔다. 군더더기 없는 구성, 기교 없는 정직한 조합이었다.


라임을 쭈욱 짜서 고수 향 가득한 타코를 한 입 베어 무니, 기름진 음식에 포위됐던 나의 미뢰들이 일제히 독립 만세를 외쳤다. 산뜻한 신맛이 혀끝을 스치는 순간, 이 타코는 더 이상 스테이크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닌 진정한 해방구가 되었다. 살사 소스의 알싸함이 혈관의 느끼함을 씻어낼 때, 나는 속으로 외쳤다.

“나도 지금 느끼함으로부터 제대로 '치킨 아웃(Chicken out)' 중이야!”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내 안에서는 곧바로 치열한 내적 갈등이 벌어졌다.

“딱 한 개만 더 먹을까? 아니지, 오늘 아침에 에그치즈 폭탄 페어팩스를 먹었잖아.”

머릿속은 욕망과 이성이 충돌하며 열띤 논쟁을 이어갔다.

"추가 주문의 유혹" VS "자기 절제의 경고"

타코 한 입의 행복과 칼로리의 후회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때 깨달았다. 미국 식도락 여행의 최고 미덕은 맛과 양심 사이에서 적당히 눈을 감아줄 줄 아는 유연한 태도라는 것을 말이다.


결과적으로, T.A.C.O. 작전으로 감행했던 치킨아웃은 완벽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저녁이 되자 2만 4천 보를 걸어 지친 몸이 다시 강력한 칼로리를 요구했고, 우리의 발걸음은 숙소 근처 중식당인 판다 익스프레스(Panda Express)로 향했다. 겉모습은 중식이지만, 속은 오렌지 치킨과 단짠 누들로 무장한 미국식 패스트푸드였다. 이 압도적인 단짠의 파상공세 앞에서 나의 타코 혁명은 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식사를 마치고 불룩해진 배를 두드리며 무심코 집어 든 포춘쿠키 속 문구는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Everything you desire must be earned."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은 노력으로 얻어야 한다.)

초록색 싱싱한 야채로 정화하려던 나의 가냘픈 시도가 결국 다시 기름진 종착역으로 돌아왔음을 짚어내는 일침 같았다.


무섭게도 인간의 망각은 여행 가방보다 무겁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인앤아웃(In-N-Out Burger) 햄버거 패스트푸드점의 노란 화살표 간판 앞에 서 있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애니멀 스타일 소스가 듬뿍 뿌려진 패티와 그 아래 눅진하게 녹아든 치즈의 비주얼 앞에 선 나는, 그 어떤 조건도 없이 백기 투항을 선언했다.

"미국까지 와서 인앤아웃을 안 먹는 건 그게 더 후회각이지! "

타코 위 라임과 고수 향은 이미 전생의 기억처럼 아득해졌다.


결국 나는 미국의 무자비한 칼로리 폭탄 앞에 완벽히 항복했다. 이전의 치킨 아웃 시도는 거대한 흐름을 거스르려 했던 작은 반란에 불과했다. Fresh를 표방하며 갓 튀겨낸 인앤아웃의 감자튀김 한 줌을 입안 가득 밀어 넣으며, 나는 남겨두었던 마지막 이성까지 깔끔하게 씹어 삼켰다.

칼로리 폭탄 앞에서 도망칠 곳도, 반격할 힘도 없었다. 나는 그저 터져 나오는 육즙에 무장해제된 채, 기분 좋게 부풀어 오른 위장을 다독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스테이크에서 잠시 타코로, 다시 버거로 이어지는 이 무자비한 굴레 속에서 혈관은 비명을 질러댔지만, 나는 패배를 인정하며 위장과 함께 당당히 외쳤다.


‘그래, Make My Stomach Great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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