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일을 하고 있는 딸이 남기는 비망록 한 페이지
엄마는 1남 5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시골 마을에 버스는 거의 없어 1시간은 넘게 기다려야 했고 초등학생 때는 학교를 걸어 다니고 매번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형제들과 함께 대화를 하며 갔다.
중학교 무렵에는 시간이 금인지라 버스를 타고 다녔고, 항상 반에서 1등을 하며 전교권 순위를 놓지 않던 모범생였다. 그런 이에게도 언제나 꿈은 있었다.
우리 엄마의 꿈은 '작가'였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백일장도 여럿 나가 상도 타왔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알게 됐다.
하지만 농사일을 하시던 부모님(나에게는 외조부님)께서는 먹고살기 바쁘고 자식들 용돈도 주지 못한 채라 글은 도저히 밥 벌어먹는 수단이 되지 않는다며 격하게 반대하셨다.
고등학생 시절의 엄마는 부모님의 뜻을 따라 '이과'로 갔다. 물론 성적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과 반에서 흥미 없던 과학 수업보다 국어 수업이 재미있었고 3년 동안 이과반에서 국어가 최상위였을 정도로 잘했다.
누구나 부러워할법한 여고 시절 워너비였지만 엄마는 항상 아쉬움이 컸었다고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기꺼이 하는 문과 반 아이들과 글 쓰기가 싫다며 투덜거리는 이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는 것. 그렇게 아쉬움을 가득 안고 눈 내리는 겨울날 가족들과 졸업 사진을 남기며 10대 시절의 마침표를 찍었다.
학력고시로 사범대에 진학해 자취를 하며 스무 살 때부터 알바를 했다. 과 동아리와 학생회까지 했을 정도로 리더십이 뛰어났다. (지금도 나를 포함해 삼 남매를 키우시면서 다정하시지만 화날 때는 정말 무섭다...)
대학교에 가서도 문학동아리와 가야금 동아리를 하며 예술 쪽의 꿈을 키워나갔지만 청천벽력으로 집에 안 좋은 일이 생겼다.
시골집(=외가댁)이 홍수가 범람해 물에 잠겼다는 것. 다행히도 우리 외조부님께서는 트럭이 있어 더 큰 피해가 오기 전 할머니와 큰 산으로 대피하셔 목숨에 지장은 없으셨다.
다만, 자신의 어린 시절이 담긴 앨범과 각종 추억들이 물속으로 고요히 가라앉아버렸다. 아끼던 공책들이 하염없이 사라지자 막막한 현실에 꿈을 좇는 것은 욕심이라 생각해 '작가'의 꿈을 접었다.
부모님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알바와 학업을 챙기며 틈틈이 공부했다. 학점도 정말 좋아 대학 조교까지 제의받았다.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다 IMF가 터져버렸고 집안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수학 선생님이셨던 큰언니(=큰 이모)와 가족들을 위해 애썼다
어느덧 상황이 마무리가 될 즈음, 대학원 입학에 성공해 평소처럼 공부를 하셨다. 우연히 단과대 선배가 "너 소개팅할래?"라며 빨간 날이던 개천절날 타 연구실 대학원생을 소개해주었는데 그 사람이 우리 아빠다...
인연을 만났던 걸까. 아빠 말로는 엄마가 정말 텐션이 높고 썸 타던 찰나에 보러 간 코미디 영화에 배를 잡고 호탕하게 웃어서 "쟤 왜 저래..." 라며 호감이 없었다고 한다.(엄마보다 세 살 많다)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지 싶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고 아빠는 '이 사람이랑 결혼할 것 같다'라는 마음을 크게 느껴 고백을 했다.
그렇게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한 나이, 스물여덟 살에 내가 생겼다.
엄마는 동기들 중 제일 빨리 결혼했고, 내가 생긴 후 대학원을 마무리하고 학교에 들어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아빠는 하필 타 지역에 발령 나 임신 기간 동안 엄마는 혼자 있었다. 그러나 지루하지 않게 '노래방'에 가서 춤추고 노래하며 태교를 했다.
2002년 2월 3일 , 내가 태어났지만 행복은 얼마 안 가 박살 났다. 아빠가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서 몸 조리 할 새도 없이 다시 교정에 들어갔다. 나는 할머니집에 맡겨지면서 주말마다 엄마를 만났고 1년 뒤 남동생이 생겼다.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매사 치열하게 살아왔으니 어릴 때 꿈은 그렇게 잊혀 갔다.
엄마는 나와 동생들을 키우면서 공부나 진로 부분에서 하나도 개입하지 않으셨다. 내가 어릴 때 무얼 꿈꿨다며 강요하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담임 선생님이 보자는 말씀에 갓 태어난 셋째 동생을 안고 학교로 향했다.
"어머니, 수림이가 수학 문제 답을 이상하게 쓰네요."
초등학교 1학년 수학 시간, 잎사귀의 개수를 세는 문제에서 잎이 4개이면 '4' 5개이며 '5'를 쓰면 되는 문제였지만 당시 나의 답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었다. (잎사귀가 늘었다가 점점 줄어드는 모습을 보며 적은 답 같다.)
엄마는 나한테 상처가 될 까봐 이 사실을 숨겼고, 선생님께는 "참 시적이지 않나요?" 라며 잎사귀가 다시 피어나고 사라지는 문제를 '계절'이라는 심상을 떠올린 것 같다며 아이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하셨다.
초등학교 1학년 이후에도 나의 진로나 공부에 하나도 문제 삼지 않으셨다. 우리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너희가 선택한 잠시의 나태함과 순간은 끝에 큰 책임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며 누누이 이야기하셨다.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나에게 "넌 작가를 해!"라며 강요하지 않으셨다.
내가 고등학생 때 졸업사진이 없어 하나하나 사진을 남기며 친구들의 "왜 찍어?"라는 물음을 다 해소해 줄 수 없어 사진을 찍은 취지와 콘셉트의 역사적 배경,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버무려 sns에 게시했다. 6월 달 오드리헵번 콘셉트로 시현하다의 건 작가님과 함께 했다. 개인 계정에 올린 후 시현하다 측 공식 계정에 리그램이 된 이후로 조회수와 팔로워가 엄청나게 많아졌다.
물론 이전부터 일기장에 있던 글을 조금조금씩 인스타에 올리며 내 감정을 토로했는데, 작가를 해야겠다! 며 전업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6월 이후로 내 계정의 유입이 늘자 '좀 더 잘해야지!'라는 생각으로 글을 쓰다 출판사 여러 곳에 협업 제의가 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산전수전 다 겪으며 작가라는 일을 하게 되었고 작년 출간한 <안녕이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북토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엄마가 이야기한 것이다.
엄마 옛날 꿈이 작가였어, 그때는 하고 싶어도 못 했고
재능 있는 친구들이 참 부럽더라.
엄마 꿈 이뤄줘서 고마워 딸
이 말을 듣고 참 놀랐다. 엄마는 한 번도 나와 내 동생들에게 자신의 꿈과 뜻을 강요하지 않았다. 언제나 나의 우상이자 꿈이었던 엄마가 해주는 말은 내게 정말 선물 같고 황홀한 유성우들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여전히 예술은 힘들다. 아무리 재능이 많고 열심히 해도 운이 따라줘야 하는 문제도 분명 있다. 하지만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을 주술처럼 믿으며 매사 후회가 남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엄마는 노래방 태교를 해서 그런가? 라며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나의 모습을 보며 뭉클하고도 애틋한 마음이라 말했다. 나도 수많은 관중들 속 엄마를 보면 어딘가 마음이 시큰해진다.
항상 나의 자랑이자 순간이 되어 준 당신의 모든 시간에 존경을 표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