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는다는 것은 때로 배려처럼 보인다.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누군가의 실수를 덮고, 지나간 상처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관계는 유지되고 일상은 굴러간다. 하지만 그런 ‘배려’가 오히려 고통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때의 불합리,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았던 어긋난 순간들. 나조차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면, 그 어린 시절의 나는 영영 외면당한 채 남겨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문득 알게 되었다. 기억을 붙들고 사는 일은 생각보다 더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고통을 되새기는 일이 곧 치유는 아니며, 어떤 결핍은 애써 마주하기보다 비워냄으로써 덜어지는 법이라는 것을. 그렇게 나는 조금씩 놓기 시작했다. 한 장면씩, 한 문장씩, 그때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흘려보냈다. 이제는 안다. 행복해지기 위해, 망각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것을. 모든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만큼만, 필요한 것만 남기고 흘려보내는 것. 망각은 무책임이 아니라 치유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