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순간
비틀스 [1]의 발매에 맞춰 영국 리버풀에 취재를 간 적이 있다. EMI에서 정킷(junket) 형식으로 지원을 해줘서 리버풀과 런던의 비틀스 명소 투어를 했다. 비틀스가 마지막으로 공연한 옥상에도 올라가보고, 애플 런던 본사, 리버풀에 있는 비틀스 박물관, 케이번 클럽, 케이번 클럽에서 공연하기 전 비틀스가 진짜 처음 공연했던 동네 커피숍 등을 다 돌아다녔다.
내가 역설적으로 충격을 받은 데가 '페니 레인'이었다. 정말 아무 것도 없어서 충격이었다. 케이번 클럽 같은 곳은 가서 보면 정말 좁아서 '이런 곳에서 공연을 했던 거구나.' 하며 인상 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페니 레인은 진짜 아무 것도 없는 시골 국도다. 그나마 비틀스가 뜬 다음에 만든 걸 텐데 하얀 담을 세우고 거기에 페니 레인이라고 써놓은 게 전부다. 스트로베리 필즈 같은 곳도 사실 별 건 없지만 고풍스러운 건물이라도 있고 그런데 페니 레인은 정말 아무 것도 없다.
그러면서 노래 하나가 만들어낸 판타지가 얼마나 클 수 있나 생각했다. 음악이 다른 예술보다 더 상상력의 여지가 많지 않나. <Penny Lane>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비틀스 노래 중에 하나고, 노래를 들을 때마다 페니 레인은 이러이러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름대로의 로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가보니까 아스팔트 길, 2차선 도로, 딱 봤을 때 '이건 뭐지?'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이어서 몇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일단 문화적인 파급력이었다. 정말 보잘 것 없는 시골길을 전 세계인이 와보고 싶어 하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이런 별 볼 일 없는 국도를 가지고 그런 음악을 만들어낸 걸 보면 비틀스가 정말 대단하긴 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웃음). 나도 어릴 때 살던 제주 집 주변에 좁은 길과 조그만 오름이 있고 그랬는데 지금 글을 쓰는 입장에서 나는 과연 어린 시절의 길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남길 만한 글을 써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페니 레인'은 예술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거라는 새삼스러운 인식을 그 어떤 오브젝트보다도 더 강하게 갖게 해준 길이고 장소다. - 박은석(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