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처 돌아보기
“자신이 얼마나 불쌍하고 외롭게 살아왔는지, 자신의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보세요.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
이혼하기 전 마지막 시도로 부부상담을 하자고 했지만, 결국 나 혼자 상담을 받던 중에 상담 선생님이 나에게 해준 말 중 하나이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바라본다면 특히 부모님 앞에서 ‘나는 예전의 내가 안쓰럽고 불쌍하다’고 말한다면, 배가 부른 소리 한다고, 네가 무슨 그렇냐고, 살면서 네가 받은 혜택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 할지도 모른다. 친구들 중 몇몇은 아마 너에게 그런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갑자기 왜 그러냐고 다시 너다운 너로 돌아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또는 네가 힘들다고 하는 건 힘든 것도 아니다, 나는 더 한 일도 겪었다고 할 이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내 삶의 시간 중, 단편적인 부분을 보고 있을 뿐이고, 사실 나는 그들에게 내 속마음을 다 털어놓지도 않았다.
사실 나는 내 감정에 솔직해도 되는, 그래야 하는 상담자 앞에서 나에 대해 털어놓으면서, 눈물을 곧 흘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나는 내가 그러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얘기하면서 자꾸 웃지 말라는 상담 선생님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나는 우리 집안에서, 다음 세대의 첫 번째 아이였다. 그 전 세대가 그랬듯, 너도 뭔가를 이루고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과, 온몸으로 받고 있는 기대가 너무 두렵고 버거워서, 어느 정도 잘해서는 안된다고 혼자 그렇게 생각해왔던 것 같다. 그리고 모두는 바빠서 어린 내가 하던 고민과 걱정은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항상 그런 건 아니었지만 때때로, 내가 애써 고민을 털어놓으면, 이 세상에 얼마나 큰일이 많고 생각할게 많은데 그런 작은 일로 괴로워하냐 도대체 왜 이렇게 소심하냐는 반응이 기억난다.
때로 내가 화를 내거나 반항하려 할 때면, 엄마는 내게 하소연을 했다. 엄마와 자주 부딪히는 동생 때문에, 그리고 엄마는 이런저런 일로 충분히 힘드니 너까지 거들지 말라는 말로. 동생도 가끔 나에게 와서 말을 했다. 자신은 성질이 이래서 엄마랑 싸울 수밖에 없지만 언니는 엄마한테 그러면 안된다고 언니는 참을 수 있다고. 그렇게 나는 화를 꿀꺽, 삼켰다. 나의 걱정이나 화나는 감정들은 표현하면, 대부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 감정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음은 나에게 상처로 남았다.
그래서 그런지, 20대 초반에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 주장을 하지 못하고 배려하고 참고 양보하면서 받은 상처가 생기면 이건 다 엄마 때문에, 아빠 때문에 그리고 ‘너’ 때문에 내가 이런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모든 건 나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라고...
그러다가 중후반에 들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잖아. 부모님도 자라면서 받은 상처가 있을 거고, 이 세상엔 완전한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러니 내가 상처 받고 큰 건 당연하지. 이건 누구나 그럴 거야. 즉, 상처를 주지 않는 부모란 없어. 그래, 상처를 주지 않는 부모란, 신이나 가능한 일이야.’
30대에 들어서서는 생각이 덧붙여졌다.
‘모든 사람들은 자라오면서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받았을 거고, 그들은 그들이 아는 방식과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하겠지. 그러면서 대물림되는 것일 뿐. 내가 할 일은 다음 세대에게 내 상처를 최소한으로 물려주는 것이겠구나. 부모 때문에 내가 이런 성격, 경향의 사람이 돼버렸다는 것은 어릴 때나 할 말인 것 같아. 어릴 때 자신이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를 알고, 그 상처를 살아가면서 스스로 어떻게 치유해 가느냐가 어른이라면 해야 할 일이겠네. 40이 넘으면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말이, 그 말인가 봐.’
“자신이 얼마나 불쌍하고 외롭게 살아왔는지,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보세요.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 “라는 상담가의 말에 나는 약간 망설인 끝에 대답했다.
“잘 버텨왔다고요. 외로웠겠다고.”
이 짧은 말을 하자 참던 눈물이 터졌다. 눈물을 닦는 나에게 상담가가 나지막이 이야기해주었다. “자신을 직면하는 겁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직면이에요. 울어도 괜찮아요. 자기감정을 찬찬히 느껴보세요.”
그렇게 나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직면이라는 단어가 다시 떠오른 것은 1,2년 후에 ‘모아나’라는 애니메이션을 통해서였다.
모아나가 Te Fiti의 잃어버린 심장을 되돌려주는 여정을 그린 내용인데, 마지막 장면쯤 흘러나온 노래는 OST 중 제일 짧지만 많은 영감을 준다. 여러 생각에 잠기게 하고 나를 직면하고 있는 나를 떠올리게 한다. 모아나가 우여곡절 끝에 여신의 ‘녹색 심장’을 돌려주러 왔는데, 여신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심장인 돌을 뺏으려는 화산의 여신, Te Ka만 그 근처에 있을 뿐. 모아나는 ‘심장’과 화산의 여신의 가슴에 있는 문양이 비슷한 것을 알고 모아나는 바다에게 부탁해 길을 열어달라고 한다. 물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던 Te ka는 바닷길이 열리자 분노에 가득 차 모아나를 향해 달려온다. 그 기세에 겁먹을 만도 한데 모아나는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고, 여유롭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여신 앞으로 걸어가면서 노래를 부른다.
수평선 건너 너를 찾았어. 너를 알아. 너는 심장을 빼앗겼지만 결코 너는 변하지 않아. 이건 네가 아냐. 너는 널 알잖아. (한국어 Ost 중)
I have crossed the horizon to find you. I know your name. They have stolen the heart from inside you. But this does not define you. This is not who you are. You know who you are.(영어 Ost)
나를 직면하는 나의 모습이 이러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무섭고 겁나지만 나를 차분하고 용기 있게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그를 통해 나의 진정한 모습을 찾는 것. 그건 오롯이 나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분노하며 달려오던 화산의 여신은 자신을 알아봐 주는 모아나 앞에서 열이 식어버린다. 그리고 심장을 되찾고 나서 그녀의 검던 몸은 꽃과 나무로 뒤덮인다.
이 장면을 반복해서 보며 생각한다. 상처 받은 모든 사람은 저 화산의 여신과 같다고. 직면해주는 사람이,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으면 영원히 분노와 슬픔에 가득 차 불덩이를 던져대며 괴성을 지르는 존재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특히 자기 자신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알아봐 주고 믿어주면,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래서 심장을 되찾게 되면 사람들은 온몸에 꽃과 나무가 자라난 Te fiti의 모습처럼, 자신 본연의 모습을 되찾게 될 거라고 말이다.
상처는 마치 용암이 갓 지나간 화산섬 같이 황폐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잘 보듬어주고 치유해주면 비옥한 토지로 변해서 예쁜 꽃과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게 된다. 심장을 되찾은 Te Fiti의 손길이 닿은 화산섬에서 식물들이 자라나는 걸 보며 내 마음속 섬은 어느 정도 꽃이 피었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