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과 풀

14회 동서문학 맥심상 수상

by 하루

작년에 엄청 일이 바빴을 때 공모전에 썼던 글..

좀 더 다듬었으면 좋았겠다 싶었지만 정말정말 바빴을 때라 공모전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글이긴하다..


‘엇? 방금.. 풀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어!?’

오랫 만에 혼자 미술관에 가서, 여러 화가들이 그린 작품을 둘러보던 중 이었다. 그것은 넓은 전시회 안에서 잠시 방향을 잃었던 순간의 우연한 발견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다시 관람방향을 정하려고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순간, 그림의 움직임을 본 것 같았다. 내가 방금 무엇을 본건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아니, 뭔가를 잘못 본 것일까? 나를 놀라게 한 그림 앞에 가서 섰다.

아까 내가 찰나에 본 그것은 분명 푸른빛의 풀들이 서로 엉켜 바람에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새로운 발견에 너무 신기하고 놀라워 그 그림 앞에 멈추어 서서 같은 자리에서 반복적으로 고개를 앞쪽으로 뒷쪽으로 휙휙 돌리며 내가 방금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재차 확인하였다. 고개를 돌리는 바로 그 순간, 여러 색과 모양, 크기의 풀들이 서로 엉켜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다시 앞으로 돌아서서 정면으로 그 그림을 보았다. 그것은 노란색과 푸른색 등의 밝은 풀 계통의 색과 갈색, 검정색등의 짙은 색이 합쳐지고 겹쳐져 있는 여러 방향의 선 들이었다. 제목을 보았더라도 그냥 무심코 바라만 보았다면 풀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여러 겹의 색깔이 겹쳐져 그려져 있는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고개를 움직이며 휙 스치듯이 그림을 바라보니 바람에 풀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 이것이 바로 ‘인상’이라는 것이구나. 찰나의 인상이, 그리고 그 것이 남기는 잔상이 오히려 어떤 사물을 이렇게 잘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고 깨달은 순간이었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나는 그림 중에서 미술사조와 상관없이, 사진과 같은 현실적인 그림을 선호했다. 정물화나 인물화, 풍경화 등을 사진을 찍어 놓은 것같이 그려놓은 그 기술과 색감에 감탄하고 또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다양한 색깔변화나 반사된 빛을 붓으로 어떻게 저렇게까지 표현 해 낼 수 있는 걸까? 나는 사진과 같은 그림의 정교함에 경외심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유명한 박물관 전이나, 유명화가의 작품전에 가면 실물처럼 그려낸 그림 앞에서 유독 멈추고 감탄하며 바라보곤 했다.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내게 가끔 미술관전시회의 표를 보내주시곤 했었다. 그러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의 전시회나, 해외 유명 박물관전시라는 등의 끌리는 요소가 없는 미술전시회에 가기가 싫어서 몇 번을 마지못해 표를 받다가, 할머니에게 퉁명스럽게 말씀드렸었다.

‘할머니, 표 이제 안 보내주셔도 되요. 전 미술 잘 알지도 못하고..’

그랬더니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음악처럼 미술도 많이 보러 다녀봐야 아는 거다. 많이 봐야 더 많이 알 수 있는 거야.’

맞는 말씀이긴 하지만, 내가 보고 싶었던 전시가 아니었기에 나는 투덜거리면서 나갈 채비를 하고 나온 것이었다.

움직이는 풀을 만난 이 날도, 그렇게 내키지 않아하며 발걸음 무겁게 걸어와 의무적으로 미술관에 들어왔던 바로 그런 날이었고, 나는 인상파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했던 사진 같은 그림이 표현해내는, 내가 넋을 잃고 바라보게 만들던, 풀을 선명하게 그려낸 그림이 아니라, 풀의 움직임과 느낌을 그린 그 인상파의 그림이야 말로 풀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풀을 잘 표현해낸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려진 풀을 보면 내가 얻을 수 있었을 느낌과 정보와는 또 다른 정보, 느낌, 생각을 주는 것이 인상파의 풀이었다.

풀을 사진과 같이 정교하게 그려냈다면 나는 그 그림을 보고, 빛이 반사된 풀의 부분을 자세히 표현한 것을, 아니면 진짜 풀을 내가 바라보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풀의 아래쪽에 생기는 그림자로 화가가 쓴 다양한 색을 보고 감탄했을 것이다. 또는 풀이 뜯어진 부분이나 흙 등을 그린 미세한 표현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와 다르게, 인상파의 풀은 그런 정보를 내게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러 색이 뒤엉켜 섞이는 모습, 그리고 풀이 바람에 움직이는 그 휘어짐과 흔들림, 역동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풀이라는 하나의 대상을 두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인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다른 감각의 정보를 주다니,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깊은 인상을 받고 이런 저런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내가 쓰는 안경과 연결지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시력이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다. 0.6~0.7정도에 난시가 있다. 그래도 뭔가 자세하게 봐야하거나 안전과 관련된 상황에서는 안경을 쓰지만, 그 밖의 상황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안경을 되도록 쓰지 않으려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정확성을 추구하며 정교, 복잡하고 첨예하며 화려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함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수많은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런 것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때로는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까지 알게 될 때도 있고, 몰라도 괜찮은 매우 사소한 사실까지 알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정보가 주는 정확성과 방대한 양에 나는 종종 피곤함을 느끼며 피하고 싶은 기분까지 드는 것이다. 실수가 최소한으로 적어야 하거나 1mm까지 정확해야 할 것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면, 꼭 필요하거나 생사를 가르는 일도 아닌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싶을 때도 가끔 있다.

또한 몰라도 좋았을 작은 정보나 사실들 덕분에,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되거나 주관이 섞인 해석을 하며 상대를 대하게 되는 일도 빈번해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안경을 벗고 싶은 것이다.

안경을 벗고 세상을 바라보면 나의 안 좋은 시력 덕분에, 모두 약간 흐릿하게 보이고 대상의 경계선도 확실하지 않고 모호하게 보이게 된다. 모든 것이 끝이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선으로 보인다. 그렇게 어느 정도는 무디게 바라봐도 괜찮은 것 같다. 아니 오히려 편하고 좋을 때가 있다.

안경을 벗으면 상대방의 얼굴에 있는 점이든, 늘어진 모공 같이 작은 결점들은 보이지 않게 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미묘한 표정이나 바람에 약하게 흔들리는 머리카락 등의 세부적이고 작은 시각적 정보가 때로 중요할 수도 있겠으나, 안경을 벗고 바라보면 그런 것은 잘 보이지 않고 오히려 각자의 본질을 더 드러내주는 몸의 움직임, 행동 등이 돋보인다.

거리의 불빛을 정확하게 사진처럼 그려낸 그림속의 불빛으로 설명해보자면 아마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정확하고 빈틈없이, 반경 어디부터 어디까지는 어떤 밝기로, 그 이후로는 점점 바깥으로 갈수록 흐려지도록 색을 섞어야하는 불빛.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을 그리기 위한 색상, 채도, 그리고 명도의 정확한 수치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경을 벗고 그 불빛을 바라본다면, 인상파의 그림 속 빛처럼 두 명암이 어우러지고 섞여, 빛과 어둠이 하나가 되어 자연스럽게 내게 부드럽고 따뜻한 인상과 느낌을 전달해줄 것이다. 뚜렷하게 어둠과 빛으로 구분되어 그려진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 불빛과 관련된 분위기나 인상 등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도 거리도 그림도, 그것을 바라보는 정확도가 높아지면서 얻게 되는 정보가 있지만, 오히려 안경을 벗고 그 형태를 흐릿하게 바라봄으로써 알게 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안경을 쓰면 좋아진 시력으로 인해 얻게 되는 여러 가지의 다양한 정보에 집중하느라 놓치게 되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안경을 벗고 모든 것들에서 일부러 한 발짝 뒤로 물러서 편한 마음으로 일상을, 주변을, 사람들을 바라본다. 놓치게 되는 것도 있겠지만 놓음으로써 얻게 되는 느낌이나 정보들도 있다.

요즘 세상에서 요구하고 또 요구되어지는, 너무 많은 세밀한 정보와 정확성, 대비, 경계선들 그리고 쨍한 불빛 때문에 오히려 잘 안 보이는 지도 모르겠다. 어떤 대상이나 사람에 대해 또 다른 정보를 줄 수 있는,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 것들이, 가치가, 생각들이.

더 잘 보려고 안경을 쓴 것 일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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