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지난 주에 고등학교 친구들 두 명과 대화를 나눴다.
한 명은 오랜만의 통화였고 한 명은 일 년 만에 만나서(나이를 드니 친구 만나는 일이 연례행사 수준이 되는 듯하다)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의 30년 가까이 나를 알고 마음을 내어준 친구들. 그만큼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지만.
통화한 친구와는 각자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간략하게 이야기 나누고 최근의 복잡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나.. 내가 요즘 방학하고 거의 집에만 있다. 사람들에게 큰 기대 한건 아니지만 실망을 했고, 도대체 내주변 다 나이 비슷한 중년인데 왜 나만 이런것같지? 누군가는 계산을 하고 누군 이용하려 들고 그 와중에 왜 나는 자꾸만 진심을 다 던지고 상처받냔 말이야. 그래서 난 요즘에 사람들을 만나기가 싫어. 잘난 척 아는 척 있는 척은 오지게 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으면서. 정말 지겹고 힘들다.”
대충 이런 내용의 긴 토로를 듣던 친구가 한마디 했다.
번아웃 왔나 보네.
아..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정말 그런가?
3월에 개학하면 또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며 웃고 지내겠지만 지금 시점에선 하나도 기대도 안되고, 온라인에도 발걸음을 떼버리고 한자리에 앉아 미친 듯이 뜨개질만 하고 있는 요즘 나의 상태를 떠올려봤다.
12월 한 달 내내 직장에서 심각한 이슈들로 인해 방학식날까지 정신적 스트레스(내가 자초한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인한 상황이 점점 커짐에 따른 피해),
독서모임에서 파생된 소진, 그리고 어설픈 간보기, 찔러보기 등(나한테 뭘 알아내기 위해 그런 떠보는 질문들을 하는 걸까. 나도 계산하려면 계산할 줄 아는데.. 자기들만 할 줄 아나 보지.)
독서모임은 몇 달간생각 중이었다. 애초에 성격에 맞지 않는 일에 뛰어든 게 잘못이었나 생각한다.
이렇게 이런저런 많은 일들이 생길지도 몰랐다. 책읽고 비슷한 나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이상적인 모임을 기대했다. 사람간의 보이지않는 관계와 감정들이 나에겐 보이고 들리고 읽히니, 생각보다 너무 많은 에너지를 뺏기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 계속 고민 중이다.
감정소모. 그게 문제다.
마치 상품을 판것같은 피드백을 받고 사방에서 각자의 어려움이나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담임병이 도지려고한다. 그래서 더 힘든걸수도.
개인적인 힘든 일이 있어도, 아들과 미국으로 여행 가기 전날이어도 빠지지 않고 운영 중인데 사람들은 쉽게 모임 하루전날에 조차 빠지고 들어오고를 반복한다. 참여리스트를 조율하면서 현타가 온다.
참여하는 사람으로 평가는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간 모임에 대한 평가는 나의 애씀에 대한 피드백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내가 왜 이렇게 노력했었나 싶다.
그냥 대충해~ 너무 깊게 생각하지마 라는 조언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그럴수가 없으니까.
몇 달째 생각을 뒤집고 엎고 반복 중이다.
막상 사람들 만나면, 특히 여자분들 몇 명이 힐링 모임이라면서 좋아해 주시니, 그래.. 좋으시다잖아. 내가 좀 더 해보자. 그리고 또 혼자 스트레스.
나는 이걸 왜 버티고 애쓰고 있는 걸까. 바보 같다.
작년에 조금은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난 여전히 여러곳에 애를 쓰고 사방에 진심으로 대하는 게 문제인가 싶다.
어떤 일을 경험하더라도 나 자신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힘이고 용기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어느시점 내가 소진되고 힘들고 속상하다면 그건 분명 그만넘어야할 선일테니까.
1년 만에 만난 친구와는 친구가 언니라고 부르는 동네아줌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몇 살 차이 안나는, 사람들에게 비싼 냄비세트를 파는 세일즈업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격이 너무 세서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떨어져 나갔고, 자기는 별생각 없이 그 사람이 하는 부탁을 다 들어주고 있다고 했다.
전화해서 나오라면 나가야 하고 자기가 필요한 상황에서만 연락을 하면서, 내 친구가 어떤 상황이고 얼마나 바쁜지는 상관하지 않고 계속 이용을 하는 것 같은 여러 상황을 듣고 있으니 화가 났다. 점점 그 사람의 의도가 느껴지면서 친구가 너무 이용당하고 호구 잡힌다고 생각이 들자, 마음이 속상하고 화가 나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손절해 버리면 안 돼? 너 진짜 우습게 봤어. 호구 잡은 거라고.
나한테 소중한 너인데 그런 사람에게 이용당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나고 마음이 안 좋다..
그 친구는 자기는 그 언니에게 기대도 없고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들어주는 것뿐이라 연락이 끊겨도 상관은 없다고 했다.
친구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내내 만난 적은 없는 그 동네아줌마를 떠올리며 복잡한 감정을 느끼다가, 나를 아끼고 생각해 주는 사람들도 내가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거나 힘들어하면, 이렇게 속상하고 걱정되고 하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 동생에게, 가족들의 편지를 공유하면서 우리가 사랑을 받기는 했어. 그러니까 우리에게 누가 함부로 하도록 두지 말자고 이야기한 것이 떠올랐다.
요즘 약속도 많기는 하지만, 빈 시간에는 혼자 뜨개질하거나 집 정리를 하고 있다. 정리하다가, 아빠가 몇 년 전에 건네주었던 봉투를 열어보았다.
내 결혼앨범.(아빠가 이걸 몇 년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그리고 어릴 때 누군가가 사주었던 기념우표모음들. 기념주화들.
펼쳐보지 않다가 정리하는 김에 궁금해서 안을 보았는데 또 외할아버지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옆에 있는 아들에게 보여주며 웃었다.
“봄이야, 엄마 할아버지가 엄마한테 밝고 귀엽게 자라래 ㅎㅎ”“
그래 내가 밝고 귀엽긴 하지 ㅎㅎ
기억에 없던 편지여서 보물을 발견한 느낌으로 잠시 서있다가, 기념우표들도 보았다. 할아버지랑 아빠가 사주신건가?
아빠가 주신 한국전기 100년 우표책을 열어보니 맨 첫 장에 우표하나가 없어져있다.
다른 우표책에서도 맨 앞장 우표하나가. 아 어린 내가 편지 쓰려고 우표 없다고 각 책마다 하나씩 뜯으면 상관없겠지 싶어서 뜯어 쓴 거 같은데.
아 어린 하루야. 이러면 소장가치가 훅떨어지는데 ㅎㅎ 어린 내 나름대로의 잔머리를 발견하고 웃었다. 사진처럼 뭔가를 기념하기 위한 멋진 일러스트의 우표도 있었지만 그 당시 많이 쓰던 우표들이 들어있는 책도 있어서 잠시 서서 생각에 잠겼다. 우표 사러 다니고 우표뒤에 혓바닥으로 쓱 해서 편지 보내고 했던 그 시절이 한편 그립기도 하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자. 어차피 평균이상으로 애를 쓰고 진심을 쓰니 조금 거둔다고 해도 문제 될 것 전혀 없을 테고. 이렇게 내 에너지와 감정이 소진될때까지 애쓰지도 말자.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좀 더 에너지를 집중하자. 특히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