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닉스 책을 다 뗐는데, 글자는 못 읽어요."
파닉스를 마무리할 즈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입니다. 교재에 있는 단어는 곧잘 읽어내서 규칙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처음 보는 단어나 책 속의 문장을 만나면 못 읽습니다. 또는 아주 엉뚱하게 읽습니다. 분명 파닉스를 배웠는데, 왜 낯선 글자는 읽지 못하는 걸까요?
이런 아이들의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이 소리의 '규칙'을 깨우친 것이 아니라, 단어를 '통암기'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스펀지처럼 통암기를 합니다. 어린아이들의 뇌는 스펀지 같습니다. 특히 시각적인 흡수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파닉스 단모음 단계에서 배우는 단어들은 대개 자음-모음-자음(CVC)으로 이루어진 짧은 세 글자 단어입니다. cat, dog, pig 같은 단어들이죠.
아이들에게 이 세 글자 단어를 던져주면, 알파벳 각각의 소리를 쪼개어 규칙을 분석하기보다 단어의 생긴 모양 전체를 그림처럼 찰칵 사진 찍듯 외워버립니다. 일부러 외우는 게 아니라, 그냥 외워지는 겁니다.
파닉스 이전에 '소리 인풋'이 먼저입니다
아이들의 이러한 통암기 본능을 규칙 습득으로 이끌어주려면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바로 머릿속에 '소리로 아는 단어'가 이미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파닉스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단어를 억지로 읽어내게 만드는 마법이 아닙니다. 이미 그림책이나 노래를 통해 '소리와 뜻'을 알고 있는 단어에 '글자의 규칙'을 연결해 주는 작업이 진짜 파닉스입니다.
충분한 소리 인풋 없이, 단어 인지가 안 된 상태에서 파닉스부터 들이밀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는 새로운 영어 단어로 인식하고 외워버립니다. 규칙 이런건 모르겠고, 그냥 소리와 단어를 외웁니다. 파닉스 책에 나온 단어는 잘 읽는데, 한글자만 바뀌어도 못 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라임(Rhyme)'보다 '블렌딩(Blending)' 먼저
보통의 파닉스 교재를 보면 단어들이 라임, 즉 '워드 패밀리(Word Family)'로 묶여 있습니다.
cat, mat, bat, hat... 모두 '-at'으로 끝나는 단어들입니다.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 아이들에게 이 방식은 아주 훌륭합니다. 일상에서 수없이 들어서 뜻을 정확히 아는 친숙한 단어들이니까요. 자신이 아는 소리들을 모아 '-at'이라는 규칙으로 묶어주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글자를 읽어냅니다.
하지만 영어가 일상에서 들리지 않는 EFL 환경의 우리 아이들은 다릅니다. 단어 인지가 부족한 아이들에게 처음부터 모양이 비슷한 라임 단어들을 묶어서 주면, 아이들 특유의 '통암기' 습성과 맞물려 역효과가 납니다. 소리의 조합 원리를 깨치는 대신 비슷한 그림 덩어리들을 통째로 외워버리는 데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규칙을 깨우치는 진짜 훈련, CV 블렌딩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는 통암기를 막고 진짜 디코딩(Decoding) 훈련을 하는 과정이 철저하게 필요합니다. 바로 'CV 블렌딩'입니다.
CV 블렌딩- 자음 모음 연결 읽기
세 글자(CVC)를 한 번에 주지 않고, 글자를 두 개씩 쪼개어 조합하는 훈련을 먼저 시키는 것입니다.
'cat'을 읽을 때 c, a, t를 한 번에 내밀지 않습니다.
자음 'c(크)'와 모음 'a(애)' 두 글자만 먼저 보여주고 블렌딩합니다. 크, 애. 합쳐서 '캐'. 이렇게 자음과 모음(CV)을 결합하는 연습을 충분히 한 다음, 남은 자음 't(트)'를 붙여줍니다. 캐, 트. 합쳐서 '캣'.
'mat'도 마찬가지입니다. m(므)와 a(애)를 합쳐 '매'를 만들고, 거기에 t(트)를 붙여 '맷'을 만듭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것 같지만, 이 과정은 결정적인 차이를 만듭니다. 아이가 자음과 모음을 연결해서 글자가 소리로 조합되는 원리를 스스로 깨치게 하는 것입니다.
마무리는 라임으로 묶어주기
CV 블렌딩을 통해 아이가 세 글자를 조합해 읽는 원리를 확실히 깨우쳤다면, 그때 비로소 라임(Rhyme)을 꺼냅니다.
"-at 소리가 나는 단어들을 모아볼까? cat, mat, hat!"
이렇게 마무리를 라임으로 묶어주면, 아이들은 이미 원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단어를 헷갈리지 않고 훨씬 빠르고 유창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파닉스 규칙을 정리하고 복습하는 용으로 아주 좋습니다.
결론
파닉스는 단어 인지 없이 일찍 시작한다고 결코 영어책을 빨리 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파닉스 하기 전에 영어 그림책 등을 통해 충분한 단어 노출을 해주세요.
그리고 단어를 통으로 외우게 두지 말고, 두 글자부터 천천히 합쳐보는 블렌딩 연습을 시작해 보세요. 영어 소리와 철자의 규칙을 깨달을때, 그때 비로소 아이는 영어를 '외우지 않고 읽기' 시작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