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도라고 말하는 그 도는 ‘상도’가 아니다.
청와 생각)
이 문장 해석의 핵심은 ‘누가’, ‘어떻게’에 있습니다. 도에 대해 말하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주어의 현재 상태가 두 가지일 수 있습니다. 저처럼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서 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지자(知者)가 있는가 하면, 노자처럼 도에 대한 자기의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각자(覺者)가 있다는 거지요.
지자가 말하는 도는 상도일 수 없다는 겁니다. 머리를 어떻게 굴리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러면 각자가 말하는 도는 상도일 수 있을까요? 일단은 각자라고 했으니 상도를 말할 수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상도’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겁니다. 즉 '도에 대한 앎'에서 '상도에 대한 깨달음'으로 나아갔다고 하는데, 다른 깨달음, 더 깊은 깨달음, 궁극적인 깨달음에까지 이르렀는지 어떻게 확정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누군가 상도에 대한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지만, 그것을 상도라고 확정하는 것은 깨달았다고 하는 각자(覺者)의 몫이 아닙니다. 상도를 확정하는 것은 누구의 몫도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그럴 권한이 주어져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해도, 말이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에 그것을 왜곡 없이 말로 전할 수 없게 됩니다. 즉 깨달음이 언어를 통한 깨달음을 수반하지 못한다면 그 궁극적인 깨달음은 언어적 깨달음을 제외한 불완전한 깨달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말로도 그 깨달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 상태를 저는 ‘모름지기’라고 합니다. 어떤 것에 대한 앎을 갖게 되었다 해도 더 해결해야할 어떤 것이 남아있는 것을 전제로 그 앎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모름지기 알고 있다'라고 합니다. 즉 어디까지 알고 있고,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앎의 내용과 앎의 한계를 동시에 간파하고 있는 겁니다.
그와 같은 모름지기를 간직한 깨달음을 ‘알음다운’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다 알았다고, 다 깨달았다고 하는 교만을 경계하자는 말이 '모름지기'입니다.
결국 도이되 상도가 아니랍니다.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
무엇이라 말하는 그 말은 ‘상명’이 아니다.
청와 생각)
앞 문장과 대구를 이루고 있는 이 문장 해석의 핵심은 ‘말’에 있습니다. 명(名)을 ‘이름’이라고들 말하지만, 결국 ‘말’, ‘언어’에 관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여기서 말이란 인간의 언어를 말합니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광물들도 말을 하지만, 인간의 말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광물들의 말과 같으면서 다릅니다. 사물 자체를 판단하고 지시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자의적, 창조적, 추상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밖의 언어와 다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인간 언어의 자의적, 창조적, 추상적 성질이 소통에 있어서는 걸림돌이 됩니다. 갑돌이가 천지로부터 어떤 느낌을 가져와서 어떤 말로 그 느낌을 갑순이에게 어떻게 전달하든 그것은 100% 같은 느낌일 수 없습니다. 어쩌면 갑돌이 자신에게도 수시로 그 느낌의 변화 또는 확충이 있기 마련입니다. 언어의 사회성과 역사성으로 정리된 그 언어 사용자들의 느낌의 천변만화하는 복잡성으로 인해, 한 가지 언어(시니피앙)에 대해 한 가지 개념[시니피에(의미)와 지시대상]을 확정하고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말이되 같은 말, 늘 그런 말이 아니라는 겁니다.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
인간이 말을 지어내기 이전까지가 천지의 스스로 그러한 시초의 모습이다. 인간이 말을 지어냄으로써 만물이 생겨나게 되었다.
청와 생각)
돌과 나무와 새는 스스로 그러한 능력인 본능으로 살아갑니다. 물론 돌연변이가 출현하여 진화를 하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우주 진화의 임계국면 가운데 하나가 인간 언어의 출현입니다. ‘인간의 출현’은 ‘인간 언어의 출현’에 비하면 임계국면을 이루기 이전에 속하는 앞선 국면에서의 작은 변화입니다. 인간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학습과 창조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천지는 진화를 통해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은 언어를 통해 천지를 재창조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는 기독교 경전(요한복음)의 기사를 저는 이런 맥락으로 이해합니다.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그러하니, 항상 욕심이 없음으로써 천지의 묘함을 보게 되고, 항상 욕심이 있음으로써 만물의 이치를 보게 된다.
청와 생각)
돌과 나무와 새도 그 내면에 신-신명-신바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로부터 주어진 것이라 그것을 따르는 것은 자연적인 욕망이라고 합니다. 인간에 이르러 신-신명-신바람의 욕망이 기괴한 관념들을 창조해내고 드디어는 욕망 자체가 변질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무욕과 유욕에서 말하는 욕(욕망)은 자연적인 욕망이 아닙니다. 인간의 문명이 창조해낸 기괴한 욕망입니다.
인간이 창조해낸 대단한 문명들, 예컨대 ‘국가’, ‘종교’, '예술', ‘돈(자본)’, '과학', ‘행복’과 ‘불행’이라는 관념, ‘성공’과 ‘출세’라는 관념, '선'과 '악'이라는 관념 등등은 자연적인 욕망으로부터 왔지만 인류의 욕망과 지혜가 창조해낸 문명이라는 겁니다.
그 욕망의 세계에서 보면 세상만물, 세상만사의 살아가는 이치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유욕을 다 버리지 않더라도 눈을 조금만 돌려서 보면 천지자연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저는 그 정도를 무욕의 삶이라 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욕망과 관념적 허위를 다 벗어버리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테지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차양자동, 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천지와 만물, 이 둘은 한 가지인데, 갈라져 나와서 이름이 다를 뿐이다. 한 가지인 것을 그윽하다 하고, 그윽하고도 그윽한 곳이 뭇 묘한 것들이 나오는 문이다.
청와 생각)
천지인이라는 삼재 사상이 있습니다. 천과 지와 인이 우주를 이루는 세 개의 근본 기둥이라는 겁니다. 한 때 제가 빠져있었던 사상입니다. 긴 논의가 필요하기에 여기서는 결론만 말씀드립니다.
<도덕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만물부음이포양)[<도덕경>, 42장]
도(道)로부터 만물까지, 언뜻 보면 3이 만물을 낳는다고 했으니, 3수인 삼재사상과 가깝다고 해야겠지요. 그런데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안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음양사상입니다.
3을 근본으로 하는 천지인 삼재 사상으로 풀이를 근사하게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저는 2를 근본으로 하는 음양사상으로 천지와 만물이 운행하는 이치를 논하는 기일원론을 택합니다.
기일원론에 의하면 천지와 만물은 음양이 생성극복하는 이치로 운행됩니다. 그윽하고 그윽한 뭇 묘한 것들이 나오는 문, 그 도(道)를 기일원론에서는 기(氣)라고 합니다.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道法自然, <도덕경>, 25장)고 했습니다. ‘본받는다’고 해서 순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가 곧 자연이고 기이고 음양입니다. 음양의 이치가 만물을 낳습니다. 음양의 그윽하고도 그윽한 궁극적인 이치를 도(道)라 하거나 천지유행지리(天地流行之理, 혜강 최한기의 <기학>의 용어)라 하거나 그 이치로부터 뭇 묘한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겠습니다.
저는 노자의 <도덕경>을 주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제가 그만한 한문해석학적 능력과 동아시아 고전에 대한 조예가 깊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로 추기측리(推氣測理)의 잡설을 논해 보았을 따름입니다. 추기측리는 혜강 최한기의 용어입니다. 기(천지만물, 세상만사)를 미루어 리(음양이 생극하는 이치, 천지가 유행하는 이치)를 헤아려본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