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는 시장통에서 과일을 파는 학생입니다.>
밥통성찰록
1. 자기소개
제게 자기소개를 짧게 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몇 번을 바꾸어 보았습니다. 이도저도 마음에 딱 와닿지 않았습니다. 제 안에 수 없이 많은 제가 있는데 짧게 어떻게 저를 소개해야 좋을까요? 요령부득입니다. 일단, 한 문장으로 지금의 저를 표현해 보겠습니다.
<청와는 시장통에서 과일을 파는 학생입니다.>
이 문장에는 저를 소개하는 세 가지 단서가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청와(靑蛙)’라는 별명입니다. 청와는 대학교 1학년 때 제가 저 자신에게 지어준 아호(我號)입니다. 말 그대로 청개구리인데 청와라는 호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별도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시장통에서 과일을 파는’, 생업입니다. 시장통에 있는 준대형마트에서 청과과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침 8시 반에 출근해서 저녁 8시에 퇴근하는 힘든 일을 합니다. 근무시간도 시간이지만, 종일 무거운 과일상자와 씨름을 합니다. 이 생업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학생’이라는 생뚱맞은 서술어입니다. 생뚱맞지 않게 이해해 보려면, 주경야독하는 사람이라는 말인가라고 이해하면 전혀 잘못된 이해는 아니지만, 제대로 짚어내지는 못했습니다.
문장 1 : 청와는 시장통에서 과일을 파는 학생입니다.
문장 2 : 청와는 시장통에서 과일을 파는 사람입니다.
학생이란, 학문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학문은 세상살이에서 묻고 배운 것을 세상살이에서 힘쓰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다들 그러하지 않겠는지요? 그와 같은 의미에서, 문장 1과 문장 2는 정확히 같은 의미입니다. 곧, ‘학생=사람’입니다.
오늘도 시장통에서 묻고 배우다가 집에 들어와서 샤워하고, 두부김치에 술 한 잔 하면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음주글쓰기입니다. 매일이 이와 같습니다.
2. 생업
앞에서 얘기했듯 지금 생업은 마트직원입니다. 중노동에 감정노동입니다. 저보다 더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저도 나름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쯤에서 청와빌라 입주자들이 어쩌고 있는지 들여다 보겠습니다.
101호 깍쟁이는 깊은 잠에 들었나 봅니다. 깍쟁이는 일이 힘들면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일자리를 옮깁니다. 깍쟁이는 한 번도 101호 문밖으로 나온 적이 없습니다. 아니 아예 잠에서 깬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계속 자는 게 좋겠습니다.
102호 범부는 일은 힘들어도 꾹 참고 묵묵히 일을 합니다. 오늘도 저와 함께 출근해서 일하고 같이 퇴근해서 술 한 잔 나누고 있습니다. 102호 범부가 참으로 고맙고 대견합니다.
201호 건달은 대박을 터뜨린다면서 일확천금을 꿈꿉니다. 지금은 방구석에 틀어박혀 얌전히 지내고 있지만 예전에 한 번 집 밖을 나갔던 일은 다음에 얘기하렵니다.
202호 장부는 자기 꿈을 펼칠 수 있는 일을 찾아 자기 꿈을 펼치거나, 그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창업을 합니다. 그 장부 덕분에 이곳 브런치 스토리에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301호 샌님은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배우고 익혀서 터득한 자기 능력을 펼치는 일을 합니다. 소위 ‘먹물’이라는 직업병을 고쳐야지 고쳐야지 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걸 보면, 그 병 더 깊게 앓아서 ‘앓음답게’ 거듭나야겠습니다.
302호 군자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고, 출세하여 자기 이름을 떨치는 일을 하려 합니다. 302호가 나쁜 놈은 아니지만 지금 이 대목에서는 얘를 잘 지켜봐야 합니다. 이루려고 하는 바가 없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이 허울이어서는 안 되겠기 때문입니다. 그 허울을 다른 말로 허명, 허깨비라고 합니다. 좋은 글을 쓰는 일에 충실하면 됩니다.
401호 일 없는 도사는 세상이 자기를 알아줄 때를 기다리면서 해놓은 일도 없이 세월을 낚으며 지냅니다. 이 놈이 문 밖에 나서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예의주시할 일입니다. 일 있는 도사는 자기가 하는 일이 거룩한 소명(召命, 신의 명령)이라며 온 힘을 다합니다. 다른 빌라에서 나와 돌아다니는 이런 분들 매일 보면서 401호 문단속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402호 성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일이 무슨 일이든 자신이 세상에 즐거이 쓰일 수 있게 합니다. 이 양반은 왜 문 밖에 안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찾아뵙고 좀 도와달라 청해야겠습니다.
3. 귀천
직업에는 귀하고 천한 것이 따로 없습니다. 사람도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귀하고 천한 생각이 있을 뿐이고, 귀하고 천한 행동이 있을 뿐입니다.
부엌데기는 집안일을 하는 사람을 ‘낮게’ 이르는 말입니다. ‘낮게’, 그 말이 ‘천하게’라는 말입니다.
집안일이 힘들다고, 요령이나 피우면서 속에 치받치는 것을 꾹꾹 누르고 지내면 ‘천한 부엌데기’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부엌데기가 천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몸가짐이 천하기 때문입니다.
집안일을 사랑과 정성을 다해 하노라면, 가족식구들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니 힘든 줄 모르고 일을 하게 됩니다. 일이 힘들다 해도 그 힘든 일을 즐거이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천한 부엌데기가 아니라, 고귀한 어머니가 되는 겁니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거나 간에, 그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문제입니다.
과연 제가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가짐과 매사를 귀하게 대하는 몸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 보는 것이 오늘의 밥통성찰이었습니다.
4. 시로써 맺습니다.
問貴賤 문귀천
勿問何生業 물문하생업
代問如何搞 대문여하고
人事無貴賤 인사무귀천
貴賤依姿勢 귀천의자세
귀천을 묻다
무슨 일 하는가 묻지 마시게
어찌 일 하는가 물으려 하네.
사람과 일에 귀천이 어디 있나
귀천은 하는 짓에 달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