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납백천(海納百川)은 상선약수(上善若水)입니다
하고 서 청와 론, 서론(書論)
통감절요 구절, 하곡 김동운 행서 海納百川 해납백천
바다는 온갖 시냇물을 받아들인다.
[청와 론]
1. 해납백천은 '바다'에 관한 이야기일까요?
海納百川 有容乃大(해납백천 유용내대)는 중국 송(宋)나라의 사서 <통감절요(通鑑節要)>에 나오는 말입니다. 바다는 온갖 시냇물을 받아 들이니 너그러움이 있어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사람이 자연을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하는 일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두 가지 사례를 들어 비교해 보겠습니다.
1) 반포지효(返哺之孝)
2) 해납백천(海納百川)
1)은 자연의 모습을 가지고 와서, 사람의 행실이 그와 같아야 한다는 교훈을 삼고자 했습니다.
2)는 자연의 모습인 것 같은 것을 가지고 와서, 사람이 그와 같아야 한다는 교훈을 삼고자 했습니다.
까마귀 새끼가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1)은 아무 문제 없습니다.
2)는 '바다'가 포용력이 있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다'라는 말이 '받다'에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를 의인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즉 바다가 인간처럼 어떤 행실을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겁니다. '바다'가 주체가 되어 '물'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제 놓치고 있었던 한 가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거대한 '바다'를 이루는 큰 일을 '바다' 혼자 해낸다는 생각입니다.
과연 그런가요?
2. 해납백천은 '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실상은 온갖 냇물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고 해야 맞습니다.
즉 '바다'가 주체가 아니라, '물'이 주체라는 겁니다. 큰 것이 작은 것들을 품어준다는 이야기를 거꾸로 해야 합니다. 작은 것들이 모여 큰 것을 이루어낸다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야합니다. 크게 이루려면, 자기를 낮은 곳으로 가게 해야합니다. 크게 이루겠다고 하면서 높은 곳으로 가고자 하면, 이룰지라도 곧 무너지게 됩니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삶의 이치입니다.
그러면 본디 '해납백천'으로 말하고자 했던 '포용력'은 어찌해야 할까요?
3. '상선약수'의 안음다움
물이 상선인 까닭은, 물이 무한한 포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용력이란 크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열림의 문제입니다. 바다가 크기 때문에 포용력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에 열려있기 때문에 무한한 포용력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열림이란 '나'를 고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전자를 만나면 주전자의 모양이 되고, 잔을 만나면 잔의 모양이 되는 물의 포용력을 물의 '안음다움(아름다움)'이라고 하겠습니다.
4. '상선약수'의 아름다움
물이 상선인 까닭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는 '바다'와 관련해서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려 합니다.
앞에서는 '바다'라는 말이 '받다'에서 왔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럴 듯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바다'의 미덕(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바다'라는 말이 '바닥'에서 왔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바닥'이란 밑, 낮은 곳이라는 말입니다. 받아들이는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라, 낮은 곳으로 저절로 향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삶의 자세가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려 드는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삶의 자세가 곧 상선약수가 배어있는 겸(謙)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5. 시로써 맺습니다.
醉生夢死 취생몽사
費半于欲醉 비반우욕취
惶中妙孫生 황중묘손생
迎甲不敢夢 영갑불감몽
侍謙後當死 시겸후당사
취해서 살다 꿈 속에 죽다
욕망에 취해 거지 반을 보내고
어느덧 묘한지고 손녀를 보게 되니
회갑을 맞는다고 꿈도 못꾸랴
겸을 모신 후에 마땅히 바닥에서 죽으리니
'취생몽사'를 운자로, 술에 취해 욕망에 취해 살아온 소회를 시로 지어보았습니다.
當에는 '마땅히'라는 뜻과 '바닥'이라는 뜻이 모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