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그대여 새벽을 노래하라
새벽에 들은 노래
- 한강
봄빛과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얼비쳐
나는 입술을 다문다/1)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나는 입술을 다문다/2)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3)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4)
다시는
이제 다시는/5)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12-13쪽)
/번호는 제가 임의로 넣었습니다.
[청와 론]
1. 혀의 속사정
<혀>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었던가 봅니다. 그 기막힌 사정을, 현실을 더듬어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정치적 현실, 이념적 현실 등이 혀를 굳게 했던 고약한 가해자일 수 있습니다.
다른 속사정의 가능성을 검진해 봅니다. 혀를 그렇게 만든 건 외적인 압제일 수도 있지만, 내적인 충격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충격이 외부에 대해 느끼는 내적인 충격이기도 합니다.
하여간 실어증 이전의 상태 쯤으로 판단되는 심리적 공황상태라고 진단해 보겠습니다.
띄엄띄엄이 아니고, 쉬엄쉬엄도 아니고, 행간(行間)도 함께 느껴 보라고 합니다. 그 행간이 틈입니다. 느껴 보겠습니다.
2. 그날 저녁에 들은 비밀 - 1) 얼비침
초등학생 시절에 동네 형들에게서 그날 저녁에 들은 그 <말>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저를 저 다른 세상으로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너 /보지/ 본 적 있니?>
태초에 빅뱅이 있었든, 말이 있었든, 수없이 많은 태초들은 그와 같은 느낌으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속이 울렁울렁 메슥거리고, 왼쪽 가슴이 울컥울컥하고, 제 깊은 곳으로부터 발생한 짜릿한 떨림이 순식간에 온 몸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부모님도 선생님들도 가르쳐주지 않은 그 /금기어/들을 저는 국어사전을 통해 배웠습니다. /일상어/들은 반쯤 죽어있는 느낌이었는데, /금기어/들은 팔딱팔딱 살아있던 겁니다. 모든 사물은 음양이 생극하듯, 언어 또한 음(어둠)과 양(빛)의 관계에 놓입니다.
음(어둠, 금기)의 언어를 통해, 음양(남녀)을 알아버린 겁니다.
/금기어/가 제게 이야기 해 준 <말>의 비밀, 그 비밀을 알게 된 소년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함부로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친구에게 말을 할 때에도 할 말을 미리 연습해야했고, 막상 실제로는 떨면서 딴 말을 해버리는 언어 울렁증이 생겨버린 겁니다.
3. 언어 편집증에 걸리다 - 2)집착, 3) 번짐과 스밈
그러던 중 대학교에 가서 그 언어 울렁증으로부터 더 심각해진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다른 곳(<요설을 휘두르는 청개구리가 되다>)에서 이미 이야기한 대로 <청와>(1.0 버전)가 탄생하면서, 저의 언어에 대한 울렁증은 언어에 대한 집착으로 바뀌었고, 마침내 언어 편집증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니가 즉자존재를 알아? 대자존재를 알아?>
고등학생일 때, <전국국어운동고등학생연합회>의 3년 선배가 제게 대뜸 들이민 비수였습니다.
<니가 이기호발을 알아? 기발리승을 알아?>
대학교 3학년으로 복학할 때, 학과 3년 선배가, 제가 입학할 때부터 저를 눈여겨 보았다고 하면서 제게 날린 핵펀치였습니다.
그때 저는 그 <말>들의 의미를 알 턱이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말>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지 저도 잘 모릅니다만.
모든 언어는 <청와>에 의해 재정의되어야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요? <세상천지만물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말>을 정의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와 사상을 기웃거리며, 이리저리 찾아본 <세상천지만물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말>들 가운데 제일 마음에 드는 <말>이 <기(氣)>였습니다. 그 <기>로써 <음양생극론>이라는 전통사상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노라 애쓰고 있습니다.
그 <기>를 근본으로 삼으면서, 기둥이 될 만한 <말>들, 가지가 될 만한 <말>들을 재정의해 나가고 있습니다.
<봄>은 황량하던 대지에 새싹이 <보이고>, 나뭇가지에 잎들이 <보이니> <봄>이라 했겠다고, 정의한 것은 잔가지에 해당하겠네요.
세상천지만물은 모두 생명이라는 대전제를 세웠습니다. 모든 생명이 생명이기 위해서는 서로 무엇이 되었든 주고 받는 관계일 수밖에 없다는 통찰(?)이 왔습니다. 생명들이 생명을, 온 생명이 자기 생명을 먹여살리는 것을 해월 최시형 선생님은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 했고, 고대인들은 <우로보로스(Ouroboros> 뱀으로 표현했습니다. <숨>은 생명, 한 숨입니다.
<넋>은 편의상 무생물계의 근원적 생명의지라고 보았습니다. 생명의지를 일반적으로는 <신명>이라는 말로 써왔고, 혜강 최한기는 <신기(神氣)>라 했고, 녹문 임성주는 <생의(生意)라는 말을 썼습니다. 저는 <신명>이라는 말로 통칭해 쓰고 있습니다.
생물계의 근원적 생명의지를 <얼>이라 하고, 인간계의 근원적 생명의지를 <영혼>이라고 지칭한 것은 방편적인 구분입니다.
넋이 뇌간에, 얼이 뇌의 구피질에, 영혼이 뇌의 신피질에 연관되는 작용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여간에 그 쯤이 <청와> 1.5버전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아름다움(알음다움, 안음다움, 앓음다움, 알움다움)>이라는 삶의 방법과 목적을 장착한 것이 <청와> 2.0버전입니다. 긴 이야기라 이미 써놓은 글로 대신합니다.(<아름다운 이 하늘 소풍 끝내는 날, 제2부 아름다움>)
4. 사물의 틈과 언어의 틈 - 4)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틈이 있습니다. 그 틈을 다른 말로 <사이> 또는 <관계>라고 합니다.
<너>와 <나> 사이가 <둘(2)>이기만 한 것은, <음양생극론>의 관점에서 보면, 상극(相克)의 관계입니다.
<너>와 <나> 사이가 <둘이면서 하나, 두레, 공동체(2=1)>인 것은, <음양생극론>의 관점에서 보면, 생극(生克)의 관계입니다.
<너>와 <나> 사이가 본디 <하나(1)>라고 하거나, <너와 나라고 할 것이 본디 없다(0)>라고 하는 것은, <음양생극론>의 관점에서 보면, 상생(相生)의 관계입니다.
<나는 그런 거 모르겠고, 나 꼴리는 대로 살란다(多)>라고 해버리면, <음양생극론>의 관점에서 보면, 각생(各生)의 관계입니다.
상극에서 상생으로 갈수록 <사물들 사이의 틈이 사라지게 됩니다>. 느닷없이 각생에서는 <사물이 틈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5. <이제 다시>는 <이제 그만>이고, <닦음>입니다. - 5)
<이제 다시>와 <이제 그만>은 <닦음(修)>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한강은 <이제 다시>에 <는>을 넣음으로써, <이제 다시>와 <이제 그만>을 한 데 버무려 버렸습니다. <닦음>을 잡아채 버렸다는 겁니다.
<닦음>은 우리 민족 전통사상과 전통학문에서 핵심으로 삼고 있는 개념입니다. 일차적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더 깊이 들여다 보면, <닦음>은 절대적인 것, 불변하는 것, 목적론적인 개념 등을 제외하고 있습니다.
<닦음>에는 끊임없는 지금-여기의 과정, 되고 되고 되어가는 됨됨이가 있을 뿐입니다.
6. 행간에 놓인 것
입술은 틈이자 문입니다.
혀는 <말>이자 <영혼>입니다.
언어는 그물입니다. 그물의 망이 아무리 촘촘하다 해도, 그물의 틈(구멍)을 다 메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언어는 사물의 모든 것을 다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어라는 틈이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 틈은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창조적으로 발현할 수 있는 문(問, 聞, 門)입니다.
영원히 잡히지 않는 진리의 흔적을 좇으려 애쓸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루어가고 있는 <언어의 그물>을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다 한들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제가 이루어가고 있는 <언어의 그물>을 모두 폐기해 버린다 한들 또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한땀한땀, 옷을 깁듯이, 모를 심듯이 제 <언어의 그물>을 기워가고 손질해 갈 따름입니다.
경직된 <언어의 그물>로부터 유연한 <언어의 그물>에 이르면, 살아숨쉬는 <몸말>을 나눌 수 있게 되지 않겠는지요. 한용운 선생님의 말씀을 변용해 보겠습니다.
<말만 말이 아니라, 스미고 번져, 주고 받는 모든 것이 다 말입니다.>
여기에 이르면 <아름답다> 아니하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