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말 판독 제15장
⧖ 몸말 판독 제15장
끝나지 않는 ⧖(면서) — 식탁의 잔여물들
엄마는 숟가락 끝으로 밥알을 헤집고 있었다.
찌개는 이미 식어 있었다.
“언니 꼴을 보고도… 너까지 내 속을 이렇게 뭉개야겠니?”
수아는 말이 없었다.
“백댄서? 이름만 그럴듯하지. 결국 남의 뒤에서 소모되는 잔여물(R)이야.
엄마는 네가 빛나는 구조(S)가 되길 바랐어.”
수아가 고개를 든다.
“엄마가 말하는 ‘구조’가 뭔데? 공무원? 대기업?
그건 이미 누가 다 짜놓은 코드잖아.”
숟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가 짧게 난다.
“나는 내 몸으로 부딪히면서 생기는 소모랑 실패를 판독하고 싶어.
그게 내 연산(⧖)이야.
언니도 실패한 게 아니라 자기 연산(⧖)을 감당하고 있는 거고.”
엄마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스친다.
“연산… 서사…
배고픈 서사가 무슨 소용이니.”
잠깐 멈췄다가,
“서울에서 언니가 보내오는 문자 한 줄 한 줄이 다 비명이야.
그걸 고차 번역이라고 부르는 네가 참 가소롭구나.”
수아가 의자를 밀친다.
“엄마는 평생 그렇게 살아.
남의 앓음을 다 오답으로만 판독하면서.”
숨이 조금 가빠진다.
“나는 엄마 세계 안으로 내 인생을 압착시키지 않아.
내 연산(⧖)은 내가 돌려.”
문이 세게 닫힌다.
쾅.
찌개 그릇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국물이 가장자리에서 아주 조금 넘친다.
엄마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다.
숟가락을 들지 않는다.
“…내가 너무 심했나.”
작게 중얼거린다.
“그래도… 저건 아니지.”
방 안.
수아는 가방을 던져놓고 침대에 앉는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틀린 말은 아니야…
그래도…”
말이 끊긴다.
천장을 본다.
아무도 식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도 다시 문을 열지 않는다.
그런데
말들은 남아 있다.
‘잔여물(R)’
‘구조(S)’
‘연산’
‘압착’
‘앓음’
그 말들이
각자의 안에서
조금씩 다른 의미로 계속 움직인다.
식탁 위의 찌개는 완전히 식었다.
아무 일도 끝나지 않았다.
언니의 문자함: [판독 기록 — 서울]
#1. 연습실 지하, 오전 4:12
“엄마, 오늘 안무 시안 땄어.
내 비중은 15초도 안 되는데, 그 15초를 위해 열 시간을 넘게 뛰었네.
무릎에서 모래 씹히는 소리가 나.
근데 이상하지?
이 소리가 내가 살아있다는 연산 값처럼 들려.
내일은 오늘보다 1초 더 선명해질 수 있을까.”
#2. 편의점 앞, 오후 11:45
“방금 백화점 행사 끝나고 폐기 도시락 먹어.
엄마가 보면 또 울겠지?
근데 나 여기서 지워지는 거 아니야.
남의 뒤에서 춤춘다고 해서 내가 투명인간인 건 아니거든.
내 근육이 기억하는 이 통증들,
나중에 다 내 서사가 될 거야.
믿어줘.”
#3. 비 오는 날의 자취방, 오전 2:30
“아파.
그냥 온몸이 다 비명을 질러.
내가 선택한 길인데,
가끔은 이 길이 나를 다 갉아먹는 것 같아.
서울은 너무 크고 나는 너무 작아서,
내가 정말 이 거대한 구조 속의 부품밖에 안 되는 건지
무서워질 때가 있어.
그래도 엄마,
나 아직 안 멈췄어.”
#4. 동생에게 보낸 비밀 메시지
“야,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
오늘 메인 댄서 언니가 나보고 선이 좋대.
남의 뒤에 서 있어도 빛이 나는 법을 배우는 중이야.
이건 구조를 짜는 사람들은 절대 모르는,
밑바닥에서만 보이는 해상도거든.
너도 네 연산 멈추지 마.
압착되지 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