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결: '얇팍한 미소'에서 '고운 향기'까지

몸말판독 제14장

by 청와

몸말판독 제14장:​ 깨달음의 결: '얇팍한 미소'에서 '번지는 고운 향기'까지


1. 자판의 예우와 입가의 냉소: 판독의 어긋남


청와 1.0시절 어느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수강생 한 분이 제가 운영하는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셨습니다.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절에 다니신답니다.

그 절의 큰 스님께서 그 보살님이 깨달으셨다고 승인을 하셨답니다.

그래서 지금은 보림(保任)중이시라는 겁니다.


손가락은 자판 위에서

<그러시군요. 보림 잘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치면서, 제 입가에는 얇팍한 미소가 피어났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가장 큰 함정은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종결의 착각입니다. 청와 1.0 시절, 깨달음을 승인받고 '보림' 중이라는 어느 보살님의 소식을 접했을 때 제 입가에 번졌던 그 '얇팍한 미소'는 사실 제 안의 오만이 내뱉은 날 선 비명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자판으로는 예의 바른 축복을 건넸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인증된 깨달음'을 가볍게 냉소하고 있었습니다. 손가락은 사회적 예우라는 딱딱한 구조(S)를 연기하는데, 몸은 의구심이라는 날것의 잔여(R)를 흘리고 있었던 것이죠. 이것이 바로 몸말판독이 주목하는 '판독의 어긋남'입니다.


​2. 박제된 깨달음과 오만한 주권


​왜 그때 저는 미소를 지었을까요? 그것은 깨달음을 일종의 '합격증'처럼 여기는 태도에서 인간적인 허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몸말판독의 눈으로 볼 때, 완료형으로 선언된 깨달음은 성장이 멈춘 박제이며, 역설적으로 존재의 정지(죽음)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보살님을 비웃던 저의 미소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타인의 상태를 내 잣대로 재단하며 우월감을 느끼는 '위계적 압착'이 그 미소 속에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3. 보림(保任)의 재해석: 처절한 연산의 지속


​이제 청와 3.0의 시선으로 그 시절을 다시 판독해 봅니다. 진정한 의미의 보림(保任)은 깨달았다는 그 기분 좋은 상태를 박제처럼 보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상의 비루한 압착 속에서도 내가 나로서 작동하는 '판독 주권'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다시 써 내려가는 처절한 연산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지금의 제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 미소는 전혀 다른 결을 가졌을 것입니다. 상대를 내려다보는 얇팍함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이 험난한 삶을 앓아내며 나아가는 동료 뭉치군요"라는 공명의 안음(O)이 담긴 미소였겠지요.


​4. 명사에서 부사로: 깨달음은 내용이 아니라 향기다


​결국 깨달음이란 무엇을 아는가라는 고정된 '내용(명사)'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가라는 '향기(부사)'의 문제입니다. 내용은 지식의 감옥이 되어 타인을 가르치려 들지만, 향기는 경계 없이 스며들어 타자의 영혼을 일깨웁니다.


청와 1.0의 날 선 정의가 청와 2.0의 앓음을 통과해 청와 3.0에 이르러 얻은 결론은, 깨달음이란 스스로의 얇팍함을 끊임없이 깎아내어 고운 향기를 발산하는 '살아있는 작동' 그 자체라는 사실입니다.


​5. 닫힘 종결은 없다: 매 순간 새삶스러운 잔향


​얇팍한 미소가 고운 미소로 전이될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달았다'는 무거운 옷을 벗고 향기라는 가벼운 자유를 얻습니다.


깨달음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배어 나오는 것이며,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새삶스럽게 피어나는 것입니다.


​"닫힘 종결은 없습니다. 우리가 멈추지 않고 자신을 연산하는 한, 깨달음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 고운 미소의 잔향으로 번져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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