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하는 사람이냐고 물으시기에...
밥통성찰록
어떤 특별한 양식의 행위를 수행이라고 한다면 저는 수행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대상에 대한 통찰력을 기르고 자기에 대한 성찰력을 길러서 그 힘으로 세상살이를 다시 살아가는 것이 수행이라면 저는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일상의 삶을 반성하고 반성한 대로 이제(지금여기)의 일상을 다시 사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수행입니다.
수행의 수란 닦음을 말하는데 닦음이란 다시 하는 것입니다. 반성하는 자세로, 성찰하고 통찰하려는 자세로, 그래서 조금씩 성숙해지는 모습으로 다시 이제의 일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아(주체)와 세계(대상)가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이 삶이라면, 성숙한 자아가 세계와 관계 맺기를 할 때 성숙한 삶이 이루어집니다. 자아는 자아대로 세계는 세계대로 자아와 세계의 관계는 관계대로 어떤 모습이 성숙한 모습인가 끊임없이 돌이켜보는 자세가 필요하겠습니다.
자아가 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의 포용력이 성숙함의 첫 번째 요건입니다. 이제의 자아가 아무리 크고 넓다고 해도 포용력에 한계가 있다면 즉 닫혀있는 자아라면 좁고 작습니다. 포용력이란 사물이 되었거나 관념이 되었거나 대상에 대해 열린 마음입니다. 열면 넓어지고 커집니다. 그것이 성숙의 첫 번째 요건입니다.
자아가 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의 섬세함이 성숙함의 두 번째 요건입니다. 포용력으로 대상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였다 해도 그 대상에 잘못이나 문제가 있다고 할 때는 포용력만으로 관계가 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잘못을 바로잡고자 할 때, 어떤 문제나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해 예리하고 예민한 사람과 아둔하고 둔감한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는 그 날카로움을 발휘해서 상대를 찌르면서 그 날카로움에 자기가 찔리는 줄 모르면서 찔리게 됩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정작 남이 자신을 찌르면 못 견딥니다. 후자는 그 무딤으로 인해 예리하고 예민한 사람에게 늘 악역의 기회를 제공해 주니 그 또한 좋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문제 또는 잘못을 대하는 경우 때에 맞게 예리하고 때에 맞게 둔감한 시중(時中)이라거나, 예리함과 둔감함의 중간쯤이라는 것은 모두 마땅한 방법이 아닙니다. 비난과 비판의 관계로 이야기하자면, 비난은 송곳과 같아서 아픈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이지만 비판은 수술용 칼과 같아서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습니다. 문제의식과 마음가짐의 관계로 이야기하자면, 문제의식은 날카로워도 되지만 마음가짐은 부드럽고 따뜻해야 합니다. 문제 또는 잘못과 사람의 관계로 이야기하자면, 문제 또는 잘못에 대해서는 날카로워도 되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부드럽고 따뜻해야 합니다. 그 부드럽고 따뜻한 촉수와 같은 감수성이 서로에게 치유의 손길이 됩니다. 섬세하게 어루만져주는 손길에는 치유의 힘이 있습니다. 엄마 손입니다. 섬세함이란 공감이면서 상대가 못 느끼는 것까지 대신 느껴주는 사랑입니다.
자아가 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의 대상에 대한 통찰력이 성숙함의 세 번째 요건입니다. 관계를 맺을 때 섬세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만 앞선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적절한 지식과 정보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과 정보는 여전히 통찰의 도구이자 대상일 뿐이지 지식과 정보를 아는 것이 통찰행위가 아닙니다. 통찰행위는 그 대상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관계된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는 그 지식과 정보와 연관된 어떤 주체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와 같은 가치의 문제를 포함합니다. 때로는 지식과 정보를 버리는 것이 통찰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자아가 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력이 성숙함의 네 번째 요건입니다. 자아에 대한 성찰이란 자기 모습을 돌이켜 보는 능력을 말합니다. 돌이켜 본다는 것은 자기 확인이 아닙니다. 자기 확인이라면 자기에 대한 자존심, 우월감, 열등감 따위가 모두 자기 확인일 수 있습니다. 즉 자기를 돌이켜 보았을 때, 자기를 뽐내고 내세우고 앞세우고 이기려들고 위로 올라서려 드는 그놈을 돌이켜 보는 것이 자기 성찰입니다.
자기를 낮은 곳으로 내려놓으려고 하고 덜어내려 하는 겸허하고 겸손한 자세를 가지려고 하는 것이 기본이기는 하겠지만, 그 자세가 섬세하게 깊어지지 않으면 겸손과 겸허가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겸손과 겸허가 자칫 상대에게 자기과시로 보일 수 있겠고, 겉의 겸손과 겸허가 속의 자기과시에 속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 의도되지 않은 모습과 속사정까지를 돌이켜 보는 것이 자기 성찰이라 하겠습니다.
지식과 의식을 쌓는 것은 배움과 익힘입니다. 배우고 익히는 공부도 제대로 해서 익으면 수그러들게 됩니다. 그런데 고약하게 익으면 또는 설익거나 썩으면 고약한 냄새를 풍기게 됩니다. 그것이 병입니다. 병든 의식, 치유되어야 할 마음으로 살게 되면 신음소리와 한숨소리와 고함소리만 나오게 됩니다.
그 병든 의식, 병든 마음, 병든 자아, 치유되어야 할 마음을 객관화시켜 보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객관화된 병든 의식, 병든 마음, 병든 자아, 치유되어야할 마음을 ‘그놈’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 자기를 치유해야겠다는 마음, 치유하고 싶다는 마음, 치유하는 마음이 또 있으니 그와 같은 것을 ‘그님’이라 불러 봅니다. '그놈'의 신음, 한숨, 고함을 '그님'이 씨익 또는 씽긋 하고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여유, 따스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너무 높지도 않고 너무 밀착되지도 않게 한두 걸음정도 떨어진 거리와 틈을 두고 '그놈'과 벗하면서 '그놈'을 섬세하게 어루만져주는 '그님'이 치유하는 마음의 모습이겠습니다. 가까우면서 떨어진 만큼 '그놈'이 '그님' 닮아가는 것이 공부이겠습니다. '그놈'이 '그님' 되면 치유된 것이겠습니다. 하여 '그놈'이면서 '그님'인 것이 저의 모습이겠습니다.
모든 것은 독도 되고 약도 될 수 있습니다.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의식이 마음을 천박하게 만들기 십상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지식과 의식에 휘둘리는 사람이기 십상입니다. 의식과 지식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의식과 지식을 굳이 지우고 비우고 없애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그 의식과 지식이 크게 깊어지고 높아지면서 의식의 주체인 자아도 성숙해지면 됩니다. 그렇게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의식과 지식의 높이와 깊이를 가지게 되면 거기에서도 깊은 소리가 울려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후자를 선택하고 그 길을 가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지식과 의식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 지식과 의식의 성질을 바꿔버리는 공부를 삭힘이라고 합니다. 즉 일상의 삶으로부터 체험을 통해 얻은 지식과 의식을 삭히면 자아가 변화합니다. 삭은 공부를 더 깊어지도록 삭히는 것을 곰삭힘이라고 합니다. '그님'이 더욱 깊어지는 것이겠습니다. 곰삭힘을 통해 이제의 상처와 문제를 안고 있는 자기와 만나야겠습니다. 자기의 성숙이고 자기의 성장이고 자기의 승화를 이루도록 자아가 자기를 성찰해야겠습니다. 그렇게 깊어지는 자아가 자기를 성찰하고, 세계를 통찰하고, 그 성찰력과 통찰력으로 자기와 세계의 병을 치유하는 섬세함을 발휘하는 것, 그것이 수행이라면 수행이겠습니다. 옛 선비들이 가신 길이겠거니 생각해 봅니다. 그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쩌겠는지요?
고인도 나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봬
고인을 못 봬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쩌리
(출근길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퇴계 선생의 시조를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