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신명-신바람 나는, 신명풀이의 미학
밥통성찰록
모든 '생명체'는 생명활동을 하기 위해서 그 생명체의 내면에 활동운화하는 근원적인 힘이 있을 것입니다. <스타워즈>에서 말하는 내면의 힘, 'force'가 바로 그 내면의 근원적인 힘입니다. 저는 그것을, '신' 또는 '신명' 또는 '신바람'이라고 말합니다. 그 신 또는 신명 또는 신바람이 나게 하는 것이 신명풀이입니다.
모든 생명은 그 생명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생명을 누린다 함은, 그 생명이 신나게 신명 나게 신바람 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신-신명-신바람이 상위 개념이라면, 흥(興)과 한(恨)은 그 하위 개념입니다. 흥은 신-신명-신바람이 저절로 스스럼없고 거리낌 없이 생명활동 속에 펼쳐지는 상황을 말합니다. 이에 비해 한은 신-신명-신바람이 억눌리고 맺히고 꼬이고 뭉치고 응어리져 제대로 생명활동 속에 펼쳐지지 못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흥이 기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라고 했습니다.(<흥취,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참조) 한과의 관계 속에서 한이 배제되는 쪽으로 가는 데에서 오는 춘흥, 한과 함께 하는 데에서 오는 취흥, 한을 삭이는 데에서 오는 추흥과 유흥을 얘기했습니다. 여기서는 억눌리고 맺히고 꼬이고 뭉치고 응어리진 한을 풂으로써 이루어지는 신나는 삶, 신명 나는 삶, 신바람 나는 삶, 신명풀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소원풀이에서 분풀이 거쳐 근본풀이까지
세상과의 갈등을 전제로 하지 않는 소원, 바라는 바가 좌절된 소원을 푸는 것이라면 그때의 한풀이는 소원풀이가 되겠습니다. 바람을 간직하고 바람을 피워가면서 사는 것, 소원을 품고 그 소원을 이루어가는 소원풀이로 사는 것이 흥취로 한 세상 사는 것입니다. 신-신명-신바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각자 각자의 생명의 의지를 실현해 가는 각생(各生)의 모습입니다.
한이 세상과의 갈등을 전제로 한 것이고, 그 원한을 푸는 것이라면 그때의 한풀이는 분풀이가 되겠습니다. 한에 빠져 살다가, 기껏 한을 푼다고 하면서 또 다른 한을 세상에 심어줌으로써 함께 한의 악순환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한을 제 안에서 푸는 것이라면 한풀이는 자기와 세상의 근본을 푸는 (근)본풀이가 되겠습니다. 자기의 근본과 세상의 근본을 현재의 자기를 초월하는 곳에서 해결하고자 한다면 그 길이 바로 밝은 그늘로 가는 길입니다. 자기의 한이 다 삭아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한이 그냥 그저 삭을 리 없습니다. 그 한을 품고 있는 자기 내면이 삭아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때로는 체념으로, 때로는 달관으로, 때로는 관조로, 때로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겠습니다만, 제가 가본 적 없는 길이라 여기까만 얘기하겠습니다.
2. 자기 내면의 신명풀이
흥은 혼자서도 낼 수 있지만, 신-신명-신바람은 혼자서도 낼 수 있지만, 신명풀이는 혼자서 하는 게 아닙니다. 신명풀이는 관계에서 오는 한을 해결하는 일입니다.
앞의 풍경 2의 엄마가 아들의 병을 고쳐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관계에서 오는 엄마의 한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경우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자기에게서, 자기 내면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곳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금강경>의 한 구절입니다. 더 풀어보겠습니다. 머무는 곳, 사실 살아가는 모든 곳이 우리가 머무는 곳입니다. 그것이 인연이고 연기입니다. 그러면, 머무는 곳 없이 마음을 내라는 건 뭔가요? 무욕(無慾)의 삶을 살라하는 건가요? 너무 높습니다. 욕, 욕망이 모든 생명의 신-신명-신바람입니다. 그 욕을 모두 버려야 할까요?
이렇게 새겨보겠습니다. '생기심'은 욕을 내라는 것입니다. 욕을내되, '무소주하라'는 집착하지 말라는 겁니다. 신-신명-신바람으로 살되, 자기가 어떤 신-신명-신바람으로 살고 있는지, 살고자 하는지 보라는 겁니다.
신-신명-신바람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바람대로, 뜻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세상사 불여의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불여의이기 십상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더 이상 거기에 매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할 수 있는, 될 수 있는 다음 단계로 가야 합니다. 앞의 풍경 3의 엄마는 그 할 수 있는 일, 될 수 있는 일, 갈 수 있는 길을 자기 내면에서 찾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한을 삭이고, 깊어진 그늘, 밝은 그늘을 지니게 되지 않았을까요?
3. 관계 속에서의 신명풀이
3.1 뜬금없는 풍경 4
햇마늘을 열심히 팔고 있을 때였습니다. 마트 앞에 웬 손수레 한 대가 마늘을 가득 싣고 나타났습니다. 노점상도 아니고 '떴다상'입니다. 점장이 나서서 이 앞에서 이러면 안 된다고 쫓는 과정에서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시장통에서 이랬다가는 대판 싸움이 벌어지곤 합니다.
3.2 블라디보스토크의 풍경 5
예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한 1년 있었습니다. 광장에서 주말이면 시장이 열립니다. 정말 온갖 것을 가지고 나와서 바닥에 늘어놓고 사고 팝니다. 집에서 쓰던 그릇이며, 차던 시계며, 읽던 책이며, 입던 옷이며, 신발이며, 제가 좋아하는 보드카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바자(bazaar)라고 해야 하나요? 만물시장, 도깨비시장이라고 해야 하나요?
3.3. 다 살아보겠다고 하는 건데
노점상을 단속하겠다고 합니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르며 수없이 많은 노점상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 제가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타는 곳, 그 길가에 일요일이면 좌판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청에서는 그들을 단속한다는 플래그카드를 그 길 담벼락에 붙여놓았습니다.
그 바로 옆에 인천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상인들이 좌판을 벌이는 그 길 건너편에 일요일이면 불법주차된 자가용들이 늘어섰습니다. 구청에서 일요일에 한해서 허가를 내줬을까요? 먹고살자고 좌판을 벌이는 상인들은 단속을 하고요?
구청 주차장을, 시청 주차장을 주말에 개방하는 겁니다. 좌판 상인들에게 개방하는 겁니다. 구와 시가 앞장서서 구민 시민들이 공생할 수 있도록 구정하는 사람들, 시정하는 사람들이 각성하도록, 구민 시민이 각성해야 하는 겁니다.
4. 신명풀이는 각비이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것을 수운 최제우 선생님은 각비(覺非)라고 했습니다. 그걸 느끼는 것이 신명풀이의 시작입니다. 개인신명으로부터, 집단신명, 천지신명, 우주신명에 이르기까지. 관계를 깨자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를 회복하자는 겁니다. 새로운 관계, 상식적인 관계, 건강한 관계, 아름다운 관계를 마련하자는 겁니다.
5. 신명풀이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관계의 회복이다.
나이를 가지고 얘기해 보겠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연장자를 예우하는 것을 두고 '경로우대'라고 결론짓는 것은 좋은 면이 있기는 하지만, 단견입니다.
자기 나이 먹은 것을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 나이 먹도록 어떤 연륜을 얼마나 쌓았는지 돌아보아야합니다. 그래야 나이를 떠나서 서로서로에게서 자기가 배울 바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사회제도적 경로우대의 문제는 위정자들에게로 돌립니다.
일상의 관계에서의 나이에 관해서는 새판을 짜고 싶은 겁니다. 선후배라고 하는 한국말, 그 속에 들어있는 따스한 관계의 추억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뒤로 미룹니다. 여기서는 그 속에 들어있는 종적 억압감, 내용도 없고 근거도 없는 '어린놈이 감히'라는 느낌, '감히 선배에게 어떻게'라는 느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뭐가 문제인지는 다 알아들었을 겁니다. 다만, 그렇게 해온 우리 풍습인지 인습이, 自己의 내면에 있는 세계에 대한 느낌의 반응체계인 얼(영혼)이 용납을 못하는 겁니다.
풍습이든 인습이든 얼(영혼)이든 그것을 뜯어고치는 것이 어디 쉬울까요?
6. 그래서 제안해 보건대
선후배라는 말을 계속 쓰거나 말거나 간에, 선후생이라는 말을 제안해 보는 겁니다. <선생은 선생이 아닐 때 비로소 선생일 수 있다>라는 글에서 이미 선생과 후생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그리로 미룹니다. 선후생에 나이는 없습니다. 먼저 묻고 배운 사람이 선생이고 나중에 묻고 배우는 사람이 후생일 따름입니다.
여기서는 신명풀이에 의한 관계로 재론합니다. 후생은 선생을 상대로 고개를 조아리고 읊조리기만 하는 조화를 택해서는 신명풀이가 안 됩니다. 선생의 말에 후생이 끼어들어 판이 들썩들썩거리는 갈등도 있어야 합니다. 그 판이 난장판이 되고 개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난장판이나 개판이나 아직 그 판입니다. 깽판에까지 이르면 분풀이로 돌아갑니다. 깽판에 이르러야 할 상황이라면 새판을 짜는 생성으로 가도록 그 판을 극복할 수 있는 슬기를 제 안에서 구하고 밖에 제시해주어야 합니다.
선생은 후생을 이루어 주는, 생성시켜 주는 자여야 합니다. 이루어주기 위해서는 극복할 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선생 입장에서의 후생과의 관계입니다. 후생은 선생을 넘어서야 합니다. 선생을 넘어서기 위한 선생들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최선의 모습이 법고창신입니다. 그것이 후생 입장에서의 선생과의 관계입니다.
생성이 극복이고 극복이 생성인, 상극이 상생이고 상생이 상극인, 조화가 갈등이고 갈등이 조화인 신명풀이의 이치가 선후생 관계에 있습니다. 선후배 관계라면 하극상이라 할 만합니다. 선후배 관계에서는 조화는 조화이고 갈등은 갈등이기 때문입니다.
7. 네 가지 미적 범주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저는 한 시절을 들개처럼 한에 묻혀 살았습니다. <서편제>의 유봉이 격입니다. 또 한 시절은 흥청흥청 살았습니다. <서편제>의 동호 격입니다. '한에 묻히지 말고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하거라'라는 유봉이 말대로 송화는 밝은 그늘의 삶을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언저리에 얼씬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밥통성찰>이라고 하는 길을 가고 있노라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연분이 제게 주어져 제 삶이 어떤 빛깔로 쓰일지 알 수 없습니다. 어제, 둘째 딸이 자기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아내와 셋이서 흐뭇하게 웃기도 하고 감격하여 울기도 하면서 밤늦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이야기 끝에 제가 한 말이 이랬습니다.
"나는 당신과 소담이 너와 이렇게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쁘고 고마워. '니 아빠와 얘기하다 보면 얘기가 산으로 가지?'라는 삼촌의 말에, '아빠랑 대화하다 보면 등산하는 재미가 있던대요.' 라던 너의 깊은 심지며, 소담이가 얘기하는 문제에 대해 차분하고 지혜롭게 이야기해 주는 당신 모습을 보며, 내가 손잡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걷자던, 그것이 바로 이런 거였지."
'청와'라는 제 아호에 그런 마음가짐이 들어있지 않았으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