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이름으로, 그 밝은 그늘의 미학
밥통성찰록
내 일터다. 그야말로 시장통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햇살 따스하게 내려 쬐는 날에도 아침 8시 30분부터 저녁 8시까지 나는 저 자리를 지키며 많은 사람들을 보고, 그 사람들과 상대해야 한다.
그 와중에 소화전 앞에서 벌어진...
1. 풍경 1
만 네 살쯤 먹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엄마의 티셔츠 끝자락을 붙잡고 따라가며 울고 불고 떼를 쓴다. 엄마의 표정은 그저 심드렁하다.
아이의 떼쓰는 울음소리에 시장통 사람들이 다 그 모녀를 바라본다. 소화전 앞에 다다를 때까지 그 상황은 계속되었다.
모녀가 소화전 앞에 이르렀을 때 엄마가 뒤돌아서며 아이의 등짝을 때린다. 아이의 떼쓰는 울음은 계속된다. 엄마가 아이의 엉덩이를 때린다. 그래도 계속되는 아이의 울음에 보는 사람들도 짜증을 내며 대놓고 뭐라고는 못하고 구시렁대기 시작한다.
아이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마트 옆의 구석진 곳으로 데리고 간다. 모녀가 함께 마트에 다시 나타났다. 아이는 울음을 그쳤지만 둘의 분위기는 아직도 심상치 않다.
마트에서 뭔가를 사가지고 나오는데, 마트 입구에서 엄마가 아이를 불러 세운다.
"너 니가 뭐 잘못했는지 알지?"
아이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니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차려, 열중쉬어, 차려!"
순간 내 귀를 의심했지만, 엄마의 입에서는 제식훈련 구령이 작은 목소리로 흘러나왔고, 아이는 구령에 맞춰 동작을 취했다.
"또 그럴 거야?"
아이는 가만히 있었다.
"차려, 열중쉬어, 차려!"
아이는 또 구령에 맞춰 동작을 취한다.
"또 그럴 거야?"
아이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렇게 모녀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 의식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구령 소리,
"전부 대가리 박아!"
2. 풍경 2
풍경 1과 같은 동선을 따라, 1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아들이 엄마 뒤를 따라가면서 엄마에게 짜증 섞인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 모습과 하는 행동으로 보아 정신지체장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엄마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앞서 걷는다.
어쩌다 이번에도 그곳 소화전 앞에 이르렀을 때, 계속되는 아들의 불평불만에 엄마는 짜증을 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마트 옆 골목으로 사라졌다.
아들이 멀뚱히 엄마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고 있을 때, 오래지 않아 엄마가 나타났다. 그때 그 엄마의 표정에서 만감을 느꼈다. 울컥하며 내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왜 그랬을까?
3. 풍경 3
또 다른 날, 풍경 1, 2와 같은 동선으로 모자가 내려온다. 풍경 2와 비슷한 상황인데 엄마의 표정이 묘하다.
엄마는 참외 매대 앞에서 참외를 고르고 아들은 엄마 뒤에서 두 손을 흔들어가며 불만을 늘어놓는다. 참외를 다 고른 엄마가 내가 서 있는 계산대로 와서 계산을 할 때 아들도 뒤에 따라와서 계속 같은 행동을 한다.
사적인 얘기를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단골손님이다. 계산을 하는 사이 그 엄마의 표정을 다시 보았다. 표정으로 보아 전혀 심적인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심드렁함도 무표정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밝다거나 어두운 표정도 아니었다.
이게 뭘까?
4. 둘째 딸이 떠올라서
둘째 딸아이는 풍경 1의 아이보다 조금 더 어린 나이였을 때, 한 번 울었다 하면 서너 시간을 울어대곤 했다. 우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한 번은, 늦게까지 분유를 먹었기에, 내가 젖병을 물려주니까,
"아가가~ 아가가~"
하면서 우는 거다. 그래서 딸아이에게 젖병을 쥐어 줬더니,
"엄마가~ 엄마가~"
라며 운다. 그래 알았다. 엄마에게 젖병을 물리게 해 줬더니 이번에는,
"아빠가~ 아빠가~"
그러면서 울어댄다. 이유야 어떻든 우는 아이를 달래려 나는 아이가 울음이 그칠 때까지 집안팎으로 아이를 안고 얼렀다. 딸아이는 제풀에 지쳐서야 울음을 그치곤 했는데, 울음을 그치고서도 울음을 추스르기 위해 '흑흑거림'을 한참을 해야 했다. 또 한 번은 나도 그만 어쩌지 못해서 아이의 엉덩이를 때린 적도 있다.
그러던 아이가 어느새 자라서 과학고를 졸업해서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장학금을 받으면서 진학을 하더니, 창업을 한다고 휴학을 했다.
둘째 아이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다른 글에서 따로 해야겠다.
5. 막내딸이 떠올라서
아내가 막내를 출산할 때 고령(41살이?)이라서 이런저런 검사를 해야 한다고 병원에서 그런다. 이상소견은 아니지만, 다운증후군이 의심되는데 염색체 검사를 해보잔다.
검사결과가 일주일 만에 나온다는데, 아무렇지 않다는 결과가 나올 거라고 믿으면서도, 아내나 나나 '혹시나?', '아니야!' 하는 마음으로 전전긍긍하면서 그 일주일을 보냈다.
일주일 뒤에 뱃속의 아이가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그때, 풍경 2와 3의 엄마는 검사를 했었을까? 안 했었을까?
지금, 내가 풍경 2와 3의 엄마였다면 어땠을까?
"건강한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다."
이 말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고 말아야 할 것인가?
6. 풍경 3 엄마의 묘한 표정
오에 겐자부로라는 일본의 유명 작가가 있다. 내가 오에 겐자부로의 삶을 조금은 안다고 그런 걸까? 그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깊은 그늘과 그 그늘을 뚫고 나오는 묘한 느낌, 그게 뭘까?
오에 겐자부로에게는 지적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들이 있다. 오에는 그 아들을 극진히 보살펴 작곡가의 삶을 살게 했다.
묘한 표정이라? 한 걸음 더 가보자. 이런 표정 본 적 있는가? 신영복 선생님의 표정이다. 통혁당 사건으로 20년간 옥고를 치렀다.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을 대학이라 하셨다.
내가 그렇게 여기니까 그렇게 느껴지게 되는 건가?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고 지으신, 그 표정이라니!
밝기만 한 흥타령도 아니고, 어둡기만 한 한맺힘도 아니다. 그늘을 뚫고 얼푸시 배어 나오는 밀양(密陽)처럼, 가신 님의 그 표정에서 나는 밝은 그늘을 본다. 그 아득한 앓음다움이라니!
풍경 3 엄마의 표정에서 나는 그 '밝은 그늘'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