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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꽃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제1부

밥통성찰록

by 청와

화훼재배 및 화훼권리 진흥청에서, 청와빌라에서 도라지를 재배하고 있으므로, 도라지재배와 도라지권리를 위해 설문조사를 하겠다면서 설문지를 주고 갔다. 설문 내용은 간단했다.


설문


1) 도라지꽃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 그 이유는 무엇인지 간단히 써 주세요.


화훼재배 및 화훼권리 진흥청


이에 청와빌라 주인인 나는 빌라 입주자들에게 설문지를 작성하게 하고 수거했다. 설문지는 무기명으로 봉투에 봉해졌지만, 나는 전지적 주인시점이라 그 내용들을 알고 있다. 설문에 답한 내용들을 여기에 공개한다.


2. 101호 깍쟁이의 설문답안


1) 도라지꽃과 대화를 나눌 수 없다.

2) 왜냐하면 언어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고 들꽃은 그 인간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꽃과 대화를 나눌 수 없다.


3) 깍쟁이의 설문답안에 대한 주인의 구시렁


이런 것을 이기적 대화라고 한다.


인간은 도라지꽃의 언어를 모르고 도라지꽃은 인간의 언어를 모른다면, 도라지에게는 도라지의 언어가 있고 인간에게는 인간의 언어가 있다면, 서로가 서로의 언어를 배우면 된다. 도라지꽃이 인간의 언어를 배울 수 없다면 인간이 들꽃의 언어를 배우려 해봐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작은 신의 아이들>이라는 영화에서, 매우 심오한 생각들을 손말로 표현할 줄 아는 청각장애인에게 강제로 발성연습을 시키면서 입으로 말하는 방법을 가르치려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그 청각장애인이 손말로 그런다.


“왜 내가 당신들의 언어를 배워야 하지요? 나는 당신들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도 내 손말로 만들어내서 쓰고 있어요. 당신들이 내 손말을 배워야 하는 게 아닌가요?”


3. 102호 범부의 설문답안


1) 도라지꽃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2)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외로울 때나 심심할 때나 들꽃에게 실제로 내 얘기를 한다. 그래서 들꽃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범부의 설문답안에 대한 주인의 구시렁


이런 것을 자기중심적인 대화라고 한다.


도라지꽃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하자. 그런데 들꽃에게 물어는 봤나? 들꽃이 그런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지. 수다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내 수다를 듣는 상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없다고? 그러니까 자기중심적 대화라고 하는 거다.


4. 201호 건달의 설문답안


1) 도라지꽃과 대화를 나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2) 이유 같은 게 왜 필요하지?


3) 건달의 설문답안에 대한 주인의 구시렁


설령 말이 된다고 해도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할 것이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가 문제인 거다. 사람끼리도 마찬가지다. 고집불통과는 대화와 소통 자체가 불통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건달을 꼴통이라고도 하는 거다.


5. 202호 장부의 설문답안


1) 잘 모르겠다.

2) 대화가 되는지 안 되는지 따질 것 없이, 해보면 되지 않겠냐? 말을 걸어 봐. 뭐라고 대꾸가 있을 거 아냐?


3) 장부의 설문답안에 대한 주인의 구시렁


대화는 시작되었으나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다. 시원시원은 하지만, 답답한 느낌도 드는 이런 걸 단순 무식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범부의 일방통행적 일장연설까지 덧보태진다고 생각해 보라.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는 한학을 하셨다. 술도 안 하셨는데 한 번 훈화를 하시면 발이 저리도록 무릎 꿇고 앉아 세 시간은 족히 들어야 했다. 선친께서도 할아버지를 이어 훈화를 할아버지만큼은 하셨다. 생전에 아버지께서는 약주를 좋아하셨다. 내 안에 할아버지의 훈화와 아버지의 술이 시너지를 일으키면 내 아이들은 어쩌지? 아내 말은 이렇다.


"당신은 거의 안 하지. 나도 거의 안 해."


이적이다. <다행이다>.


6. 301호 샌님의 설문답안


1) 실험을 해보니, 대화가 가능하다고 하는 긍정적 실험결과가 57%로 나왔다.

2) 식물들이 인간의 감정과 태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실험을 해보았다. 사랑이라 써놓은 화분의 도라지는 잘 자라고, 증오라 써놓은 화분의 도라지는 시들었다.


3) 샌님의 설문답안에 대한 주인의 구시렁


샌님의 실험결과에 대해 여하튼 화분의 꽃이 인간의 문자를 이해한다니 대단한 샌님의 재미있는 실험결과이다. 조만간 들꽃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려나?


어라? 식물들의 화학적 신호체계를 분석해서 소통체계를 알아내고 있다고도 한다. 화학적 신호? 전기적 신호, 수신호, 음성신호, 문자신호, 신호 수단이 다를 뿐이지 의사소통이지 않겠나?


7. 302호 군자의 설문답안


1) 도라지꽃과 대화가 가능하다.

2) 자연이 자신의 의미가 이러저러하다 말해 준다. 매화는 추운 겨울을 견뎌야 자기처럼 그윽한 향기를 낼 수 있다고 했다. 돌과 구름과 산도 내 얘기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에 대해서도, 우주의 섭리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뭐라고 했다.


3) 이런 것을 자의적 대화라 한다. 말이란 화자의 손을 떠나면 청자의 몫이 된다. 군자가 들꽃과 나눈 대화의 진수는 대화라기보다 해몽이랄 수 있겠다.


8. 401호 도사의 설문답안


1) 도라지꽃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2) 영혼이 맑은 사람은 다른 영혼과 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


3) 도사는, 한술 더 떠서 들꽃의 영혼과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영혼이 있는데, 영혼이 맑은 사람은 다른 영과 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거다. 범부영혼, 건달영혼, 샌님영혼, 도사영혼, 내 영혼은 이 같은 영혼들로 잡스러운지라 맑은 영혼을 만나기는 그른 듯하다. 맑은 영혼을 갖지 못한 나로서 도사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겠다.


흔히 영화 <사랑과 영혼>에 나오는 것처럼 몸 없이 떠돌아다닐 수도 있는 그 무엇을 영혼이라고 하나 보다. 나는 영혼(넋, 얼)이 몸의 심층적인 작동체계일 뿐이라고 본다. 어떤 정의가 영혼을 옳게 정의한 것인지 나는 모른다. 영혼에 대한 남들의 정의는 이해가 되지 않으니, 나 나름대로 근본이치를 생각하는 방식에 의해 위와 같이 정의해서 쓰고 있을 따름이다.


9. 402호 성인의 설문답안


1) 도라지꽃과 대화를 나누어 보자고요.

2) 온갖 것들이 느낌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겠어요? 좋건 싫건 한 번을 만나도 그 느낌이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도라지꽃 한 번 느껴 보자고요.


3) 성인은, 온갖 것과 대화를 나눈다. 군자가 온갖 것과 자의적인 대화를 나눈다면 성인은 온갖 것과 수용적인 대화를 나눈다. 무한한 감수성, 온갖 것을 느끼는 것이 성인의 수용적인 대화이다. 성인은 온갖 것들이 가지고 있는 느낌, 내놓는 느낌을 섬세하게 느낄 줄 아는, 느끼려고 하는 사람이다.


온갖 것들에 대해 잘 느끼는 비슷한 방식이 또 있기는 하다. 분석적 느낌, 어디서 나온 말이지? 분석적 느낌은 샌님의 예리한 느낌이다. 샌님의 예리한 느낌이 중성적 느낌이라면, 건달의 부정적 느낌을 예민한 느낌이라고 하고, 성인의 긍정적 느낌을 섬세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고창 친구네 도라지밭

제2부가 곧 발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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