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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멍 Oct 31. 2021

아빠, 정말로 장점이 없으면 입학을 못해요?

토요일엔 주로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아는 형님>을 즐겨본다. 출연하는 게스트에 따라 재미의 기복이 더러 있는 편이지만 대체로 일정 수준 이상의 웃음은 보장해 주는 것 같아 자주 시청하는 편이다. 교실을 컨셉으로 하는 컨텐츠라서 그런지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나의 학창 시절이 생각난다. 평균적인 또래 친구들보다 지나치게 소심했던 초등학교 시절의 내가 스치듯 떠오른다.


나는 소심함에도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해도 복합적인 성격을 갖췄을 테고 상황과 사람에 따라 소심함이 발현되는 정도가 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엔 같은 반 아이들 앞에서 나의 생각을 발표하는 것 같은 행위들은 줄곧 잘 했었지만, 수학여행 같은 대외적 이벤트에서 오직 반장이라는 이유만으로 돌발적으로 무대로 호출되어 쇼맨쉽을 (대체로 막춤이었던 것 같다.) 강요당하는 것에 대해선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다. 비슷한 예로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 대표로 육상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주 종목이었던 높이뛰기 시합은 충분히 연습하고 준비해서 무사히 마쳤지만, 동료의 부상으로 급작스럽게 대신 출전해야 했던 계주 달리기 경기에 대해서는 심각한 수준의 심적 스트레스를 느꼈다. 그때 코치님으로부터 갑작스러운 출전 소식을 전해 듣고 걱정과 염려에 심장이 얼마나 빠르게 뛰었는지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미취학 아동 타이틀을 달고 나서부터 중등 교육을 마무리하는 시기까지 꽤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상황에서 나는 '소심한 남자'라는 정체성을 내 것이라 여기며 지냈고 이후에는 대학 입학과 군 생활을 기점으로 점차 소심한 성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 따라 자꾸 그런 의문이 든다.  그 '소심한' 성격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인 걸까. 특별한 기준이라는 게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그것을 내 성격의 일부라 여기며 살아왔을까. 그 당시엔 주관이라는 게 생기기 전일 나이라서 그냥 그런 줄로 알고 지냈지만, 요즘은 나의 주관을 앞세워 합리적인 의심을 시도해본다. 어쩌면 나는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소심한 아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다시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로 돌아가 보자.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무대에 불려 나왔지만 나와는 다르게 전교생을 상대로 엄청난 막춤을 선사한 친구가 있었다. 그 장면이 너무나 충격적이고 인상 깊어서 수학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엄마한테 내가 본 것들을 그대로 전해드렸다. 이야기를 듣더니 엄마는 덤덤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어디 나가서 그렇게 할 줄도 알아야 해"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니까 엄마의 논리와 기준에선 좌중을 압도하는 무차별적 막춤을 추는 사람이 '대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는 '소심한' 성격이 되는 거고. 이번엔 육상대회로 넘어가 본다. 코치님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 나는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을 미처 컨트롤하지 못하고 출전 보이콧을 시사하는 듯한 발언을 내뱉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이렇게 긴장되는 마음이 너무 싫어요." 

코치님은 한숨을 쉬며 다음과 같의 말씀 하셨다.

 "남자라면 이런 긴장감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해"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교육자로서의 자질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품게 만드는 발언이지만 그때 난 정말로 그런 줄로 알았다. 그 이후에도 비슷한 수준의 긴장감을 즐기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소심하고 남자답지 못한 성격이구나'하고 여러 번 자책하기도 했었다. (아니 근데 즐길 게 따로 있지. 뭣하러 긴장감을 즐긴단 말인가. 이거야말로 완전 허세 아닌가.)


결국 나의 '소심한 성격'이란 것은 대부분 타인의 기대와 기준점에 근거하여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다수였던 것 같다. 엄마나 코치님의 기준에선 '소심이'였지만 아마 다른 누군가의 기준에선 내가 엄청난 '대범이'였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 엄마나 코치님의 발언이 억울하거나 너무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돌이켜보면 나는 소심했던 게 아니라 남들보다 더 준비성이 철저하고 무언가를 차근차근 접근할 때 더 실력이 발휘되는 성격이었던 것일 뿐인데, 그것을 단순히 소심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내 성격의 장점이라고 알려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참고로 코치님과는 지금도 연락하며 잘 지낸다.)


토요일 대낮에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까닭이 있다. <아는 형님>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포맷 중에선 이런 게 있다. 전학생(게스트)들이 형님들 앞에서 장기를 하나씩 보여주고 형님들이 그것들을 인정해 주어야 비로소 '합격~!'이라는 호령과 함께 입학을 할 수 있는 규칙. 문득 소심했던 (이라고 쓰지만 실상은 준비성이 철저한 성격이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그 시절의 나와 같은 성격을 가진 아이들이라면 왠지 이런 걱정을 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장점이 없으면 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건가...?'


아마도 그들은 걱정을 한가득 끌어안은 시선으로 엄마나 아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겠다. 아니, 어쩌면 나중에 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내 아이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겠다.


"아빠, 정말로 장점이 없으면 입학을 못해요?"


만에 하나의 확률이겠지만 혹시라도 아이로부터 이런 질문을 듣는 어른이 있다면 부디 아이들에게 소심하다고 말하지 않고, 아이의 철저한 준비성과 프로다운 면모에 따뜻한 칭찬을 건네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이의 걱정을 달래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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