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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 Nov 09. 2022

개명을 하다가 마음이 보였다

7월 즈음이었나?


몇 해 전부터 하던 생각이긴 하지만, 그 즈음부터 '은비'라는 이름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당최 떠나질 않았다. 35년을 그 이름으로 살았는데, 이름이 예쁘다는 칭찬도 많이 들었는데, 내가 보기엔 세상 촌스러웠고 무엇보다 나라는 사람은 많이 변했는데, 이름이 그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굴레처럼 느껴졌다.


아마 형편없는 작명 스토리도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된 데 한 몫을 했던 것 같다. 가 태어나자, 기억에는 없지만 그 당시 사진으로 보나 그 아들들로 보나 종로 멋쟁이가 틀림없었던 친할아버지는 '가희'라는 누가봐도 간드러지는 이름을 들고 오셨고, 딸을 여섯씩이나 두고도 뒤늦게 출가하셔서 스님이 된 외할아버지는 누가봐도 철학적인 '우주'라는 이름을 지어오셨단다. 두 분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이름을 두고 싸우시자 엄마가 짜증이 나서 한자도 싫고 한글로 '은은한 비'가 되라는 뜻에서 '은비'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하며 엄마는 불필요한 농담도 덧붙였다. 이름을 지을 때 세상을 은은하게 적시는 비 같은 아이가 되길 바랬는데 장맛비 같은 아이였다고. 어쩌면 나는 은비라는 름 보다 은비라는 이름을 지어준 엄마 특유의 진심일지 농담일지 모를 그 설명이 더 싫었는 지도 모른다.


이름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던 어느 날 아침, 갓 태어난 둘째딸의 이름을 고민중이라는 친구의 카톡을 받았을 때 느낌이 왔다.


이거 더 이상 무시하면 안 되는 마음이구나.



나의 '충동'에는 임계치가 있다. 충동의 정도를 수치로 측정 할 수는 없지만, 삶의 중요한 결정을 서너번 내 손으로 내리면서, 그리고 때로는 무시하고 지나친 충동(혹은 감)에 대해 후회하는 일들이 생기면서 내 마음엔 어떠한 저울이 생긴듯하다. 친구가 둘째이름을 짓는다는 걸 듣는 순간 그 저울의 눈금이 정중앙에서 오른쪽으로 딸깍 움직였고 내 마음에 따르르릉 하는 시끄러운 알람이 들린 것이다. 동네에서 가장 이름을 오랫동안 지어왔다는 작명소에 연락을 했다. '백운학 작명소'. 이미 몇 해 전부터 알아봐두었던 곳이다. 12시30분에 만나기로 했다.


남편에게 나 이름 바꾸러 간다고 말했더니, 점심시간이니 자기도 같이 가겠단다. 오랜 역사가 무색하게 허름한 오피스텔에 자리잡은 작명소에 들어서니 벽면마다 옥편과 성명학, 명리학 책이 빼곡히 꽂혀있었고, 봐도 이해하기 힘든 성명학 이론이 족자로 걸려있었다. 머리가 희끗한 아주머니가 우리를 맞이해주셨다.


          "하고 싶은 이름이 있으세요?"

          "주하? 정도 생각해 봤는데... 받침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김주하 아나운서에 대한, 아니 정확히는 그 사람의 보여지는 이미지에 대한 선망 또는 동경에서 비롯한 마음이었지 싶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내리 꾸준히 장래희망 칸에 적었던 '언론인'은 언론인이 하는 일이 아니라, 그런 다부지고 뭐든지 똑부러지게 해낼 것 같은 이미지에 대한 동경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이 여지껏 지속되고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렇게 똑부러지는 아니, 그래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르게 말하면, 나 스스로 다부지지 못하고 똑부러지지 못 해 보이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또 다르게 말하면, 그런 압박이 있었다. 늘 듣던 말들. "애는 똑부러지게 생겼는데 똑부러지질 못 해." 적어놓고 보니, 내가 똑부러지길 바라는 것은 나의 욕망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욕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름이 나왔다. 나의 사주 오행에는 나무가 많고, 그에 비해 불과 흙이 부족하다고 했다. 그런 부족한 기운을 보완해주는 이름이 스무 개 정도가 나왔다. 그 중에 하나 골라 쓰라는 것이다. 이름이 갖는 운세는 획수에 따라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순리에 따라 행복해지거나, 큰 성공으로 집안을 일으키거나. 작명가 선생은 보통 부자들은 순리에 따라 행복해지는 운세를 선택한다고 했다. 나또한 그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품위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남편이 옆에서 '혜나'라는 대지격의 이름이 이쁘다며 집안을 일으켜 달란다. 그 말에 코웃음을 치고 작명소를 나왔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룸미러로 틈틈히 내 얼굴을 보며 마음에 들어 온 몇 개의 이름을 매치시켜 보았다. 주아, 주하, 유빈, 예빈... 그래, 너가 그렇게 원하니 혜나도 한 번 생각해 볼게, 남편.


[아름다운 아침]이라는 뜻풀이가 되는 주아라는 이름이 괜찮은듯 했다. 따뜻하고 밝은 심성처럼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남편이 선택한 혜나라는 이름은 [슬기로움을 붙잡는]이라고 뜻풀이 되었다. 조금 쓸쓸하게 느껴지지만, 그 쓸쓸함 안에서 무언가를 추구하는 이름처럼 보였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이름 바꾸려고."

        "왜 갑자기?"

        "아니, 그냥 바꾸고 싶어서. 주아랑 혜나 중에 어떤 게 어울려?"

        "해가 아, 이 해야 아니면 여, 이 해야?"

        "여, 이."

        "이름 가운데 발음 어려운 글자 들어가는 게 별로네. 주아가 멈추는 것 없이 잘 발음되고 좋은데?"

        "알겠어~."


엄마와의 통화 후 마음 결정이 쉬워졌다.

[혜나] 그게 내 새 이름이구나.


부모님이 지어 준 이름을 뒤로 하내가 새로이 이름을 선택고자 했던 마음은 요행을 바라거나 인생이 답답해서가 아니라, 부모가 갓 태어난 나를 바라보던 시선과 그 아이에게 바라던 바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찾은 나 된 나로 온전하게 서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름다운 아침같이 찬란하고 따뜻하고 밝은 느낌을 바랬던 적도 있었다. 내로라하는 음악가 집안에서 자란 성악을 전공하던 그 아이가 그런 느낌의 사람이었다. 예쁘긴 엄청 예쁜데 착하긴 또 얼마나 착한지, 때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찬양을 올리다가 감사함에 눈물 흘리는 그런 아이였다. 무대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찬양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는 그 아이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순수한 아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꽤 오랫동안 하며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살아오며 박힌 쪼가 있는데 그렇게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자라오며 새긴 나이테와 흔적들을 품고선 지향할 수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혜나가 딱이다.

'슬기로울 혜 譿, 붙잡을 나 䛔'


약간은 쓸쓸해 보이고 외로워 보이지만 슬기로움을 붙잡는 사람. 거기에 '말씀 언' 변도 두 글자 모두에 들어가 있어 더 마음에 든다. 말과 글로 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사랑하는 나에게 나다움을 담뿍 담아 새 이름을 선물했다. 그간 고생했다, 은비야.

 

앞으로 잘 살자, 혜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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