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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 Oct 04. 2022

증발해버리고 싶은 감정

언제나 흐름은 비슷하다.


한 사람에게서 출발한다.

그 사람이 내뱉는 말들 중 하나를 내 감각이 캐어올린다.


한 사람에 대한 분노

한 사람에게 8년 동안 당한 부당한 일들에 대한 분노가 나의 상담사의 비유에 따르면 고구마 줄기가 끝도없이 달려 올라오듯이 끌려온다.


그러다 자조로 넘어간다.


"너는 늘 남탓이구나. 너가 자초한 일이야. 너가 지금 무능력하잖아. 받은 것도 많잖아. 그럼 붙어있어야지. 붙어있으려면 닥쳐. 멋지게 할 말을 하고 연을 끊던가, 아니면 닥치고 있던가. 둘 중에 하나만 해.

징징대지마 이 한심한 년아."


나의 기분은 high와 low의 양극단을 오간다.


어떤 날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때 기분 좋았는데.

어느 날은 아무것도 해낼 수 없고 그냥 증발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증발해 버리고 싶다는 것은 죽고 싶다는 것과 마음의 결이 다르다. 난 죽고 싶지 않다. 증발하고 싶다. 아닌가, 죽고 싶은데 그러기엔 너무 책임감이 없어보이니 그냥 수동적인 죽음을 맞이 하고 싶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는 건가?


어느 시트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주인공과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인정한 후 여주인공이 담담하게 말한다.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어요."


증발하고 싶다는 건 그런거다.

상황을 비관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의 삶이 나아질 지도 모르겠고 더 나빠질 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런 삶의 고저마다 즐겁던 슬프던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이 피로할 뿐이다.

어느 정도의 긴장감(stress)는 건강에 좋다고 하지만, 더 이상은 싫다.


어떤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다.


최고의 선물처럼 느껴지던 '인간의 감정'은 나를 피로하게 하는 호르몬 물질이 되어버린다.

어느 순간 기뻐하는 나자신조차 꼴보기가 싫어진다. 기뻐하는 게 의미가 없어진다.

"순진하게 기뻐하기는...너 이러다 또 금방 슬퍼질 거잖아."


이렇게 우울함의 밀물이 밀려온다. 아무일도 없는데.


출근을 하기 위해 버스정류장을 향해 걷다가

퇴근을 하는 버스안에서

열심히 보고서를 작성하다가


청소를 하다가

밥을 먹다가

그냥 앉아있다가


갑자기 눈과 코가 뜨거워지며 눈물을 흘리던 그 때들의 밀물이 느껴진다. 연예인들이 tv에 나와서 매일 이야기 하는 우울증이라는 게 이것이겠지. 이쯤 느꼈을 때


내 안의 둘이 시끄럽게 싸워댄다.


"그래. 다들 우울하다니깐. 너만 그런거 아니니깐 유난좀 그만떨어."

"끝까지 넌 스스로한테 채찍질 뿐이구나. 어떤 날은 무진장 스스로를 사랑하다가 어떤 날은 무진장 스스로의 정서를 짓밟다가. 이건 결국 내가 어렸을 적 사랑받았던 방식의 끝없는 되풀이잖아."

"아, 너 또 부모 탓하니? 탓 좀 하지마."


이건 양육의 산물일까, 내 기질의 발로일까?


지긋지긋하다. 첫단추부터 잘못꿰어진 내 인생.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니 다시 꿸 수도 없고, 그냥 대강 양 깃 높이를 맞춘 다음 찬찬히 꿰어왔는데,


그랬더니 어거지로 맞추느라 꿰지않은 단추만큼의 공백이 움직일때마다 들여다 보이는 것이다.

그 구멍이 들여다 보일때마다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어느날 그 구멍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그 사이로 우울함의 밀물이 밀려들어오는 것이다.


이번엔 나의 상담사의 조언대로 내 공간에 쏟아내어 본다.


늘 나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상담사의 조언을 따른다.


상담사가 이렇게 해보세요. 그렇게 해도 죽지 않아요. 라고 하면 나는 그 말을 믿고 뒤로 그냥 다이빙 하는 것이다. 그래 깨지나 이래 깨지나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으니, 밑져봐야 본전이다.


상담사들은 이렇게 실천하는 내담자는 처음이라며 감탄하고 나는 그말에 또 우쭐대다 그딴거에 우쭐 대지 말라는 내 마음의 소리에 닥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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