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시인의 캐리어 걸
출처
1. 다음 카페, 푸른 시의 방, 캐리어 걸/ 정끝별, (https://cafe.daum.net/poemory/JW6F/13865)
2. 나무위키, 정끝별, (https://namu.wiki/w/%EC%A0%95%EB%81%9D%EB%B3%84)
정끝별 시인의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다. 이름이 '끝'과 '별'이라는 외마디 글자들이 합쳐진 순한글 이름이라고 나무위키에 설명이 적혀있다. 그리고 1964년 생으로 생각보다 더 연배가 있다. 뭔가 막연하게 나는 저 이름을 보고 1980년 생을 상상했다. 나무위키에서 정끝별 시인의 시가 탁월한 리듬과 언어감각이 있다는데 그 말이 공감 갔다. 내가 본 '캐리어 걸'이란 시가 나에게 어떤 사진 혹은 엽서처럼 장면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시의 따뜻한 분위기가 나무위키에 나온 설명 중 '끈질긴 인간에 대한 사랑'과도 잘 맞아떨어진다고 여겼다.
일단 처음 시를 바라보고 있으면 되게 정갈하게 여러 반찬이 나온 한정식 집 같은 형식 같았다. 2줄 아니면 1줄의 반복, 짧았다 길었다 하는 문장의 길이가 어떤 리듬감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 같다. 캐리어 걸, 여행용 큰 가방을 끌고 다니는 어떤 여자의 이야기라는 것을 시의 제목에서부터 느낄 수 있다. 시 제목이 한글이 아닌 영어로 간단명료하게 표현되어서 나는 더 발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리어 걸에게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지 궁금해졌다.
1연에서 캐리어를 끌고 길 위를 떠나는 사람이 있다. '레일로' '매일을' '내일로'이 3글자이면서, 가운데 글자는 같으며, 첫 글자의 모음의 소리가 같다. 아무튼 비슷한 느낌의 글자가 주르륵 레일을 타고 내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1연부터 너무 좋았다. 일단 큰 가방인 캐리어를 끌고 매일 기차를 타는 어떤 소녀가 있을 것이다. 한국철도공사에서 2007년 여름부터 판매한 패스형 철도 여행 상품 이름도 '내일로'인데 기차를 나타내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그저 동음이의어로 한 소녀가 내일을 향해 걸어 나가는 것인지 조금 헷갈렸다. 아무래도 후자가 더 맞지 않을까 싶다.
2연에서는 그 소녀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화요일에 인-서울 해 목요일에 탈-서울 하는'이란 문장을 봤을 때 어쩌면 문장이 저렇게 간결하면서 우아할 수 있을까 싶었다. 내용을 보자면 화요일에 서울에 들어가서 목요일에 서울을 떠난다는 것을 보면 참 소녀는 바쁘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뒤에 '편도 2시간 거리 소도시에서 자영업 하는 부모님과 고3 동생과 산다'라는 구구절절한 가정사가 나오니까 소녀가 더 안쓰럽게 느껴진다. 가는데만 2시간이면 왕복 4시간을 걸려 소녀는 서울에 가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영업 하는 부모님'과 '고3 동생'이란 말이 더 소녀의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바쁜 부모님과 손이 한창 많이 가는 동생이 있는 20대 장녀의 삶이 저절로 그려진다.
그리고 1연에서 내일로 여행상품이 왜 나왔나 싶었더니 내일로 이용 자격이 만 27세 이하의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소녀는 20대 중반이라는 설정을 '내일로'라는 단어로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고3 동생'이란 말을 통해 떠올랐다.
3연 '캐리어의 생명은 바퀴'라고 미리 설정을 하고, '길 위에서 튀는 바퀴의 비명이 매일을 끌고'라며 바퀴가 비명을 지른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단순하게 사물을 의인화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 비명이 '매일을 끌고'라며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적인 상황으로 순식간에 뒤집어버린다. 처음 이것을 보고 긍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긍정인지 부정인지 헷갈린다. 그냥 길바닥 위에서 큰 캐리어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 소녀의 힘듦이 선명하게 그려질 뿐이다. '비명'은 소녀의 고통이고 그 원동력으로 매일을 산다고 처음 해석했다. 그런데 지금은 '비명을 질러도 매일이란 것은 멈추지도 않고 굴러간다'라고 들린다. 어쩐지 타이어 밑에 사람이 깔렸는데 그래도 그 차는 계속 굴러간다는 것처럼 더 부정적이며 무섭게도 느껴진다. 그렇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이고, 시에서 표현된 문장이나 단어의 결은 무미건조하다. 그래서 과하지 않은 선에서 부정이든 긍정이든 모두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4연을 보고 있자니 2연에서 느꼈던 기분을 비슷하게 느꼈다. 소녀의 하루가 얼마나 바쁘고 고단하고 힘든지 세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다. '낮에는 강의실 도서관을 오가며 편의점 패스트푸드점에서 잠깐잠깐, 하루 한 끼는 꼭 학식을, 밤에는 24시 도서관열람실 스터디카페 아니면 찜질방에서'라고. 쉼표로 컷 컷 컷 이어지는 장면들을 보면서 절대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지독한 고단함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대학생 때가 떠올랐다. 오늘은 수업이 연달아 있으니까 매점에서 김밥과 라면으로 때운다던지, 학식으로 좀 변주를 주면서 저렴하게 먹는다던지,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리포트를 쓰던 때라던지. 시에 나온 소녀처럼 아주 열성적이고 숨 가쁘게 지내지 않았지만 얼추 비슷한 경험이 있어 그런 기억도 떠올랐다. '잠깐잠깐' '하루 한 끼는 꼭' '24시 도서관열람실'이라는 단어를 보면 소녀는 자신의 신체를 갈아서 열과 성을 다해 서울에서의 대학생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소녀의 생활이 조금씩 드러나니까 '캐리어'에는 '편도 2시간 거리 소도시'에서 챙겨 온 소녀의 짐일 것이다. 기숙사나 자취를 하던 친구들이 짐을 바리바리 싸 오던 모습도 연상된다. 그런데 5연에서 '컨베이어 길을 벗어난 캐리어가 파손되는 건 순식간'이라며 잔잔하게 야금야금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갑자기 시련을 맞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편의 소설 혹은 드라마를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6연을 보면 소녀가 대학교에 가기까지 '대치동 학원'이며 '24시 맥도날드'를 오가며 공부해서 겨우 대학교에 들어갔는데 '팬데믹'이 소녀의 대학생활을 와장창 깨부수어버렸다. 정해진 방향으로 연속적으로 걸어 나가던 소녀가 팬데믹 코로나를 만나서 겪게 되는 좌절감과 허탈함이 6연에서 절절하게 표현된 것 같다. 그리고 팬데믹은 소녀가 '간헐'적으로 어쩌다가 서울과 집을 오가던 것을, '정기'적으로 매주 서울과 집을 오가게 일상의 패턴을 확 바꾸게 했다. 소녀가 열심히 쌓아 올린 성을 팬데믹이 한순간에 모래성으로 만들어 파괴한 것에 대해 언뜻 난 무서움마저 느껴지기도 한 것 같다.
7연 '캐리어의 안전은 강도와 잠금장치가/ 캐리어의 가치는 경도와 크기가 보장한다고'라며 캐리어의 성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미 여기까지 읽어 보면 '캐리어' 자체가 '소녀의 삶'이란 생각이 든다. 앞에 나온 성질은 단단하냐 보안 장치가 되어 있느냐로 어떤 멘털이나 정신적 영역 같고, 가볍거나 무겁거나 혹은 크기가 크냐 작냐는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보인다. 여기서 되게 헷갈리는 지점이 '안전'이니 '가치'니 하는 것은 정신적이며 모호한 단어들이다. '안전'은 위험이 생기거나 사고가 날 염려가 없음이고, '가치'는 사물이 지니고 있는 쓸모이다. 이 소녀를 안전한 물건인지 가치가 있는지가 중요하다. 졸업하면 회사에 캐리어를 팔듯이 자신을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되게 7연은 단순하게 이해가 될 것 같으면서도 단순하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8연을 보면 좀 더 쉽게 7연이 이해가 된다. '졸업을 유예한 너는'이란 주어가 나오면서 7연은 소녀가 쓰는 자기소개서 같은 개념이란 생각이 빠르게 들었다. 그리고 '아직 캐리어를 끌고 기타 등등의 커리어 케어를'이란 짧은 문장에서 취업을 위해 스펙을 더 쌓고 있는 졸업을 유예한 소녀의 이미지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아직 사회 밖으로 나오기에는 불안하여 졸업이 임박했지만 유예하는 모습이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다. 그리고 '아직'이란 말에서 졸업할 때가 지났음을 느꼈고, '기타 등등의'란 말에서 이력서에 한 줄 더 쌓으려고 대외 활동이나 공모전을 전전하는 것이 연상되었다. 또 '캐리어를 끌고' '커리어 케어를'이라는 ㅋ과 ㄱ의 반복이라던지 비슷하게 들리는 단어들을 시인은 잘 매치시킨 것 같다. 이런 문장을 보고 있자니 나무위키가 말해준 '탁월한 리듬감과 언어감각이 이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모든 연이 좋았지만 9연이 나는 화룡점정이며 절정이란 생각이 든다. '대출한 삼색 고양이' '초록 바질' '사원증과 원룸 비번이 있으니'라는 말에서 초록색을 보았다. 위에서는 캐리어도 딱히 화려하지 않고 무난한 회색일 것 같고, 소녀의 하루도 챗바퀴처럼 반복되는 잿빛 색이다. 그런데 9연에서 어떤 생명을 상징할 수 있는 초록색 혹은 삼색 고양이란 색깔이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내용은 전혀 생명력이 있지 않다. '캐리어에는 끌어당겨 대출한 삼색 고양이와 초록 바질과 사원증과 원룸 비번이 있으니'라고 한다. 끌어당겨서 대출을 했다면 뭔가 엄청난 아파트 혹은 차가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자질구레한 것들 투성이며 한 사람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게 더 좌절스럽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상황에서 싱그럽게 빛을 내고 있을 삼색 고양이와 초록 바질 혹은 사원증과 원룸 비번이 그려진다. 한 사람에게는 전부이지만 그것들은 캐리어에 다 들어갈 만큼 보잘것없음을 시에서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9연까지 읽으니까 소녀는 대학생이 아니라, 취업도 했고 사원증도 있으며 원룸에서 월세를 살고 있는 직장인 같다. 그런데 도대체 10연에서 읽은 것처럼 '지치지 않는 내일과 지지 않는 매일을 캐리어에 끌고/ 커리어가 너를 인-서울에 체크인 해 줄 때까지' 서울과 집을 오가야 하는 것일까. 사실 사원증이란 게 있어도 정규직이 아니라 인턴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여기서도 '끈질긴 인간의 사랑'이 보인다. 이 시에서 가장 크게 보인다. 지치지 않고 내일 다시 도전하며, 지지 않고 매일 반복해서 캐리어를 끌고 나간다는 소녀의 불굴의 의지가 이 시의 마지막에 잘 드러나고 있다.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커리어가 너를 인-서울에 체크인 해 줄 때까지'라며 소녀는 자신의 포부를 당차게 말하고 있다. 특히 방금 말한 문장은 모양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 같다.
정끝별 시인의 캐리어 걸을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시가 이런 시구나. 내용은 내용대로 진행이 되면서 동시에 형식적인 미학을 놓치지 않는 한 편의 엽서 같은 시 말이다. 정말 오랜 시간 찜 해놓고 이제야 쓴다. 처음 대충 이 시를 읽을 때는 이 시가 이렇게 따뜻한 시일 줄은 몰랐다. 그냥 '캐리어 걸' '커리어' '졸업 유예'라는 말이 나와서 취업이 어려운 어떤 청년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근데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그런 고난 속에서도 홀로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소녀의 삶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다시 보니까, 왜 소녀는 졸업을 유예하고 인-서울과 탈-서울을 오갈까. 저기 나온 '사원증'이란 것은 취업을 했다는 말로 처음 해석했는데 다시 보니까 소녀가 인턴을 했던 회사의 회원증이 아닐까. 그래서 '커리어가 너를 인-서울에 체크인 해 줄 때까지'란 정규직 직장을 찾는 그날까지가 아닐까.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가기 전에 겪은 과정,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다니면서 겪은 과정, 서울에 있는 직장을 구하기 위한 과정까지 일련의 잿빛 인생이 컨베이어 길 위에 줄줄이 나열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 와중에 '삼색 고양이'와 '초록 바질'이 주는 안정감과 힐링의 무게가 남다를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그러면서 문득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도 떠오른다. 그리고 한 소녀의 삶이면서, 내 삶이 될 수도 있는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고군분투하는 그녀들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정끝별 시인의 시 '캐리어 걸'을 읽었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