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82년생 김지영 / 조남주/ 민음사 / 장편소설
신선한 제목에 끌려 구매한 책은 그 두께만큼의 울림도 주지 못했다. 그렇게 책장 한 구석에 무심히 방치해 두었던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소설 책 한 권으로부터 촉발된, 다소 기이한 최근의 현상들을 이해하고자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다시 읽었다.
조남주 작가의 세 번째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중편 정도의 분량이며, 평이한 문체로 쓰여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쉽게 읽힌다. 오랜 기간 많은 독자들의 선택을 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소설은 제목 그대로 82년에 출생한 서른네 살 여성의 일대기, 주요 사건과 심리를 제 3의 관찰자-김지영 씨의 정신과 주치의-가 서술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또한 각종 리포트와, 통계지표 등을 과감히 투척함으로써 소설과 르포형식이 교차되는 독특한 서사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의 더 높은 가독력과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불명확한 시점상의 문제를 비롯한 서사문학으로서의 완성도에 대한 지적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럼에도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 한 권의 가치는 함부로 폄하할 수 없을 듯하다. 이 소설은 페미니즘을 표방하면서 시대와 사회의 거대 담론으로부터 부속화된 여성, 성과 사랑에 함몰된 인형 같은 여성만 진열해 놓는 부류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보인다. 실존하는 당대 여성의 서사라는 점에서 (절대 다수 여성)독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 책, 젠더 이슈를 한국 사회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데 일조한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모든 비평은 정당하고 의미 있다. 이 소설에 대한 이성적, 합리적 비판은 ‘양성평등’에 대한 반동이 아닌, 그 길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그래서 이 길지 않은 텍스트를 다시 정독하고 몇 자 적어본다.
관성慣性에 따른 집필이랄까.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적지 않은 기간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집필해 온 조남주 작가의 이력을 엿볼 수 있다. 얼핏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 소설의 전개 방식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가설을 정해 두고 몇 가지 명제의 나열을 통해 목적된 결과를 이끌어 내는 연역법적 접근. 당대 한국의 저널리즘이 맹신하고 있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같은 연역법적 논리는 흑백논리와 이분법적 사고로 이어질 때가 많다.
“여성의 삶은 고단하다, 그것은 남성의 (사회, 가정, 관습)권력 독점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작가는 82년생 김지영 씨가 대면해 온 지극히 보편적인(?) 한국 사회의 남성들을 등장시킨다. 호감을 폭력으로 표현하는 짝.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규정하는 청년들. 피해자인 딸에게 오히려 야단을 치는 비정한 아버지. 성희롱에 가까운 질문을 투척하는 면접관. 업무와 직위를 수단으로 서슴없이 성희롱을 저지르는 상사. 여직원들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남자들. 타인의 소소한 일상을 향해 혐오의 언어를 내뱉는 남성 등.
피해자가 있으려면 당연히 가해자가 존재해야 한다. 한국사회 남성들의 특정 기질이 있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겠다. 이를 전재하더라도 여느 김지영 씨들에게 반문하고 싶다. 당신들의 주변에는 정말 변태적이고 폭력적이며, 성적 권력과 우월감에 도취해 있고 가부장적 사고에 길들여진 남성들만 넘쳐나는가.
이 책을 페미니즘 입문서 혹은 페미니즘 바이블이라고까지 우러르는 이들에게 또한 묻고 싶다.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남성을 절대 악惡으로, 극복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이 ‘양성평등’을 위한 이성적 태도인가.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온전히 여성만의 서사로 보고자 할 때에도 편협성에 대한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조남주 작가(1978년생)는 영아 낙태가 빈번했던 1982년, 그 해 태어난 가장 많은 여성 이름 ‘김지영’을 소설의 제목으로 정했다고 한다. 그만큼 보편적인, 동 시대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였다. 하지만 김지영 씨는 82년 그 언저리에 태어나 오늘을 살아가는 이 땅의 여성들을 조밀하게 담아낸 캐릭터가 아니다.
도시 거주. 빈곤과는 거리가 먼 가정 형편.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안정된 직장. 연애, 결혼, 출산. 그리고 아파트. 얼핏 당연하고 평범해 보이는 이 명제에도 계급적 층위라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 김지영을 보편적인 한국 사회 여성으로 규정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특정 부류에 국한된 인식의 한계성을 드러내는 부분들도 적지 않다.
때문에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 독자들조차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절대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텍스트가 아니다. 화자는 김지영의 이야기가 다름 아닌 당신의 삶이며 얼마나 심각하고 처절한 문제인지 인지할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또 다른 김지영 씨는 콧방귀를 뀔지도 모른다.
주인공 김지영은 지극히 평면적인 스토리보드 위에 수채화로 그려진 캐릭터다. 3인칭 서술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녀에게는 삶의 입체성과 구체성이 철저히 결여되어 있다.
무엇보다 소설에서는 일하는 여자 김지영의 모습이 제대로 구현되어 있지 않다. 직장과 일에 대해 밥벌이 보다는 자아실현의 수단 정도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은 여성 노동에 대한 몰이해 혹은 자기기만처럼 보인다.
사족으로 덧붙여 오늘날, 이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거론코자 한다면 여성노동에 대한 전향적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이때의 여성노동이란 생산적 경제활동이나 임금노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독자가 소설 속 인물과 공명共鳴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내 삶과 잇닿아 있는 생동감을 지녔거나,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한 사상과 신념을 표출하는 캐릭터를 대면할 때이다.
아쉽게도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는 그 같은 인물을 만날 수 없다. 82년에 태어나 우리나이로 서른네 살인 여성 김지영 씨는 타인의 수군거림 따위에 심리적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인물이다. 자기 삶에 대한 확신도 갖지 못하는 존재. 왜곡되고 특정적으로 치우친 설정들을 그저 이해와 공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위하는 것이 여성의 서사, 이 시대의 페미니즘을 읽는 방식일까.
물론 김지영이라는 캐릭터를 무조건적으로 폄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에는 또 다른 김지영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지영을 적극 변론하고 나선 친구, 직접 나서 변태를 응징하는 용감한 여학생들, 기지를 발휘해 곤경에 처한 지영을 돕는 스카프 여성, 며느리이기 전에 딸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엄마의 목소리 그리고 고인이 된 선배 차승현 씨의 목소리 등. 어쩌면 이들이야 말로 작가의 진의를 함축하고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장치일는지 모른다.
김지영은 그렇게 나름의 저항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존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다. 사회와 가정, 관습으로부터 침묵을 강요당해 온 여성의 현실을 대변하려 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다른 비판적 견해도 얼마든지 가능한 설정이다. 아울러 소설 후반부에 난데없이 등장한 화자, 김지영 씨의 정신과 주치의의 모순된 자기 고백은 이 서사의 분명한 목적지가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시대와 대중이 규정한 바 ≪82년생 김지영≫은 여성의 서사다. 그리고 또한 미완의 서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분명 조남주 작가는 대중의 열렬한 지지나 가혹한 비판, 사회적 파장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작품을 집필했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게 아니라면 이 소설은 분량부터 재고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훨씬 더 많은 활자로 채워진, 방대한 두께의 책으로 출판 되었어야 한다. 그 안에는 보다 치열하게, 아니 더욱 더 처절하게 여자로서의 현실을 살아내는 주인공 김지영 씨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울고 웃고 갈등하며 연대하는 또 다른 김지영들과 정대현 씨의 이야기가 씨실과 날실로 엮이고 이어져 있다. 그래서 마침내 소설은 젠더 갈등의 실체인 사회 구조를 개혁하고 가부장적 관습을 극복해야 한다는 역설力說 로 끝을 맺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사의 미완성이야 말로 이 소설의 가치이며 의의가 아닐까 싶다. 여러모로 아쉽게 끝맺은 ≪82년생 김지영≫은 책을 접한 독자들, 더 나아가 한국 사회 민중에게 젠더 이슈와 페미니즘의 담론을 어떻게 수용하고 풀어갈 것인가 되묻고 있음이다.
이 책을 다시 정독하며 나의 성급한 독서를 돌아보게 되었다. 애초 이 소설은 그리 가볍게 읽을 텍스트가 아니었다. 그간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여성’이라는 통증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기회였다.
82년생 김지영 씨에게는……. 같은 교실과 강의실에서 함께 했던 지영이들과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마주했던 무수히 많은 지영 씨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당신들을 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한다. 아니 어쩌면 나도 당신들에게는 가해자 혹은 방조자 중 하나였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한 축으로 함께 버텨 주고 있는 당신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와 응원을 전한다.
2016년에 첫 출간된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2019년 가을을 즈음해 다시금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이유는 영화로 제작, 개봉되었기 때문이다. 원작의 작품성이나 가치와는 별개로 성공한 저작물이 2차 콘텐츠로 가공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유독 이 영화는 개봉 이전부터 대중의 지나친 비난과 조롱 또 그만큼의 지지를 받으며 문화계 전반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그저 소설을 소설로,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하고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 편을 가르고 적대 행위를 가하는 추잡한 작태作態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 시대 문명과 지성에 대한 회의감마저 엄습한다. 최소한의 사리분별력 조차 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맘충. 김치녀. 된장녀. 메갈. 한남충. 나와 우리를 향한 그 모든 ‘혐오’를 혐오해야 한다. 그것이 헬조선을 뒤엎을 수 있는 힘, 민중 연대의 시작일 것이다.
[읽어주고 싶은 문장]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김지영 씨의 어머니가 된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 끝을 꾹 밟고 선 작지만 묵직하고 굳건한 돌덩이. 김지영 씨는 그런 돌덩이가 된 기분이었고 왠지 슬펐다. 어머니는 김지영 씨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딸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넘겨 주었다.
▶ 37P
법이나 제도가 가치관을 바꾸는 것일까, 가치관이 법과 제도를 견인하는 것일까.
▶ 132P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 144P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산,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 149P
[이 책의 가독성: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