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야마구치 슈(/ 김윤경)
이용 중인 도서 구매 사이트를 비롯해 여러 곳으로부터 이 책에 대한 추천 메시지와 메일을 받았다. 하지만 책의 제목부터 개인적 취향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역사와 철학, 인문학을 그저 쓸모와 효용으로 재단하는 시류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30-40대 남성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는 입소문을 끝내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의 저자 야마구치 슈(山口周)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전문 학자도 교수도 아니다. 그는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명성을 쌓은 인물이라고 한다. 결국은 또 돈벌이 얘기를 하려나 보다, 그 분야에 영 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역시 읽으나 마나 한 책이겠구나. 반쯤 체념하며 첫 장을 넘겼다. 그런데 프롤로그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저자의 단단한 내공과 결기가 느껴졌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부터 이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를 집필한 궁극적인 이유에 대해 밝히고 있다. 로버트 허킨스(Hutchins, Robert Maynard)의 지론 그대로, 철학을 배우지 않고 사회적 지위만 얻어 문명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또한 철학을 배움으로써 얻게 되는 네 가지 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언하고 있다.
첫째는 상황을 정확하게 통찰하기 위해서다. 철학은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깊이 있게 통찰하고 해석하는 데 필요한 열쇠를 얻게 해준다고 설명한다.
둘째는 비판적 사고의 핵심을 배운다는 것이다. 철학을 배움으로써 자기 행동과 판단을 무의식에 규정하고 있는 암묵적인 전제를 의식적으로 비판하고 고찰하는 지적 태도와 관점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셋째는 어젠다를 정하는 능력, 즉 눈 앞의 세계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객관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사유의 힘을 키울 수 있다고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철학을 배움으로써 같은 비극의 반복을 피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무지와 과오, 다양한 실패의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얻은 교훈이 바로 ‘철학’이라는 것이다.
앞선 프롤로그의 연장선으로 이어지는 제1부에서 저자는 이 책의 성격 및 집필 의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기존 철학 입문서들과는 차별화된 접근법과 그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며, 연대기에 따른 철학 이론의 나열은 현실에서는 물론 학습법으로도 무용하다는 소신을 밝히고 있다.
본론이라 할 수 있는 2부는 4개의 장 50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챕터는 본문의 내용을 압축한 제목과 본문에서 다루어지는 철학자의 간략한 프로필로 시작된다. 저자가 앞서 제시한 ‘철학의 유용성’이라는 화두를 공유하고 있지만, 각 챕터는 상호 연속되거나 종속되지 않은 별개의 독립된 텍스트로 보기에 전혀 무리가 없다. 이 책은 굳이 첫 장부터 진득하게 읽지 않아도 좋은, 편리에 따라 읽을 수 있는 나이브한 철학 입문서인 동시에 실용서인 것이다.
저자는 <왜 사람은 이렇게 행동할까>, <왜 조직은 바뀌지 않을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어떻게 사고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네 가지의 화두를 던지고, 철학사의 주요 이정표로 기록된 철학자와 사상가들을 소환해 그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있다.
50개 챕터에는 익숙하거나 한 번쯤 들어본 듯 한 혹은 전혀 낯설고 생소한 철학, 심리학, 언어학, 문화인류학, 비즈니스 이론들이 혼재되어 있다. 천천히 되짚어 읽어 가면 대체로 이해할 수 있고 수긍이 되는 내용들이다. 저자는 본문의 축을 이루고 있는 학자들의 철학 이론과 개념, 주요 용어를 핵심적으로 요약해 전달하는 한편, 역사적 사실과 당대 일본 사회에 대한 예시 등을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각 챕터의 분량은 5 ~ 8 페이지 정도로 길지 않다. –철학자가 아니라 비즈니스 컨설턴트인- 저자는 제시된 철학 이론에 관한 원론적 고찰이나 보다 깊이 있는 해설을 담아 전달하는 대신, 독자들에게 사유의 여백과 지적 호기심을 보급하기로 한 듯하다.
2부의 여러 챕터를 통해 저자는 일본의 정치, 사회, 기업 문화 등에 관한 문제의식을 진지하면서도 대담하게 제기하고 있다. 그 내용 중에는 이웃 나라 한국에 대한 직설처럼 들리는 부분들 또한 적지 않다. 그만큼 가깝고도 먼 나라, 한일 양국의 사회구조나, 경제, 문화, 민중의식에서의 유사점이 많다는 방증傍證일 것이다. 특히 인상적으로 읽고 생각해 본 챕터들에 대해 적어 본다.
18. 혁신은 새로운 시도가 아닌 과거와의 작별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먼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지금까지의 방식을 ‘잊는’ 것, 즉 이전 방식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라는 독일 출신의 심리학자 쿠르트 레빈(Kurt Zadek Lewin)의 지론을 설명한다. 그리고 거품 경제 시기의 달콤한 환상에 도취해 비전도 혁신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일본 사회를 ‘쇼와昭和시대를 끝내지 못한 시대’라 냉철하게 진단한다.
본문에는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의 산을 내려와 다른 산으로 오르는데 주저하고 서툰 일본의 현상은 물리적 한계성과 더불어 철학적 사고의 부재에 기인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저 바다 건너 이웃 나라 얘기로만 치부할 수 없는 메시지다. 개발독재, 토건주의土建主義의 잔상 혹은 우상偶像과 결별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는 ‘박정희의 시대를 끝내지 못한 시대’로 불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이 챕터의 후반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기술되어 있다.
오늘날 청년층에게는 경제, 돈, 물욕에 치우친 척도를 부정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거대한 물결을 일으키며 지각 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문장을 읽으며 탄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청년층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바 없고, 저자의 주관적 의견을 과대 해석할 필요가 없음도 물론이다.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인지라는 것이 있다. 물질적 풍요와 성공만이 절대 가치이자 신앙이 되어버린 한국의 청년들과 부와 권력의 세습과 서열화를 너무 일찍 깨닫는 청소년들……. 우리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7. 자유는 견디기 어려운 고독과 통렬한 책임을 동반한다
독일 출신의 사회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제론한 파시즘 fascism의 기원에 관한 명료한 해설을 읽으며, 이란성쌍둥이 같은 한일 두 나라의 민주주의를 생각했다.
프롬은 자유의 대가로 주어지는 고독과 책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유로부터 벗어나 권위에 맹종하는 민중의 속성이 파시즘, 즉 전체주의와 독재 권력을 가능케 한다고 주장했다. 나치 독일에 대한 탐문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지론은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의 현대사를 통해 완벽하게 실증되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가능케 한 것은 그들이 앞세운 탱크가 아니라 민중의 철저한 무지와 위선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는 프롬의 분석을 토대로 (일본)민중은 자유가 들이미는 책임을 감당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고 진단하며 전체주의에 동조하는 어리석음을, 과거로의 회귀를 염려하며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민중 개개인이 정신력과 지식을 갈고닦음으로써 중세시대와 같은 과거로의 회귀를 피할 수 있다는 지극히 자위적인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저자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피할 수는 없을 듯하다. 아니 더 냉정히 보자면 일본 사회는 이미 과거와 같은 군국주의軍國主義 망상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모양새다. 이 책이 국내에 번역 출간된 2019년은 한일 양국의 정치 외교사의 중대한 변곡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표면화된 몇 가지 이슈만으로는 전례 없이 감정적으로 격화된 대립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본의 우경화라는 혐의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시민들의 높은 지성과 교양, 문화의식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헌신으로 이어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들에게는 민주주의를 위해 지불한 대가나 민주화에 대한 경험치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미국 함대의 포격에 의해 근대국가로 변모했으며, 역시 미국의 가공할 만한 무력에 굴복해 민주주의를 강제 이식받은 국가가 지금의 일본이 아닌가. 야만의 역사를 추억하며 진실과 정의 앞에는 무지로 일관하고 있는 그들에게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묻고 싶다.
파시즘의 부활은 비단 이웃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화의 유산과 함께 독재정권에 대한 맹종과 집착이라는 과제를 짊어지고 있는 오늘의 대한민국 민중에게는 괴이한 선택을 되풀이할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경기 불황이 심화될수록 좌든 우든 포퓰리즘 populism과 선동정치로 민중의 이성을 시험하려 들 것이다. 자칫 집단지성集團知性은 사멸하고, 우리 모두가 원색의 깃발만이 나부끼는 광장에 서게 될는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 먹먹한 공포를 직시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다. 독서는 야만의 시대 앞에 순순히 무릎 꿇지 않겠다는 인간 최후의 저항이자 보루가 될 것이다.
부디 한일 양국에서 유익한 철학, 인문학 책들이 많이 출간되어 팔리고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본인들의 철학적 각성 그리고 한국인들의 철학적 무장 없이는 양국의 평화 공존은 요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지식인 야마구치 슈가 쓴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요즘, 독자들의 선택을 받을 이유가 충분한 책이다. 철학의 원리와 개념을 나열하거나 주입시키려 하지 않고, 실증적인 사례와 명쾌한 해설을 통해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 내는 유려한 필력과 주제의식이 인상적이다. 또한 의도성의 여부를 떠나 독자를 철학적 고민과 사유의 길로 이끈다는 점이 이 책의 또 다른 가치라고 생각한다.
크고 작은 결점들도 눈에 띈다. 무엇보다 이 책 역시 마케팅적 고려에 따라 구매 독자를 선정하고 기획, 집필, 출간되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철학이라는 어젠다를 조직, 기업, 비즈니스의 영역으로 결부시키려는 해석이 때로는 부자연스럽고 생뚱맞아 보였다. 또한 비즈니스 컨설턴트라는 저자의 직업의식이 불필요하거나 과하게 드러나는 부분들도 적지 않다.
몇 가지 의문점들도 남는다. 저자는 그리스 자연철학은 고루하고 무용하다는 이유로 칸트 철학은 지나치게 사변적이라는 이유로 ‘철학의 쓸모’라는 논제에서 배제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동양철학에 대해서는 논외로 둔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철학 이론의 등장 배경과 예시를 설명하는 목적으로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에 대해 여러 차례 기술하고 있지만,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다.
나는 '지식인의 학문적 소신과 양심'이란 무엇일까, 생각하며 이 책을 내려놓았다.
[읽어주고 싶은 문장]
자신이 무엇인가를 원할 때, 그 욕구가 ‘진짜’ 자신의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타인이 불러일으킨 르상티망에 의해 가동된 것인지를 판별해야 한다.
▶ 53P
베스트셀러는 대게 현행 시스템에 잘 적응해 큰돈을 번 사람이 쓴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은 사람이 같은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택함으로써 시스템 자체가 자기 증식 또는 자기 강화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시스템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현상은 정말로 바람직한 일일까?
▶ 101P
매슬로의 고찰에 의하면 성공한 인물들 가운데서도 두드러지는 자아실현형 인간은 오히려 고립 성향이 있고, 극소수 사람들과만 깊은 관계를 유지한다. 이 매슬로의 지적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점점 ‘얕고 넓어지는’우리의 인간관계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 108P
공평이나 공정과 정반대에 있는 차별이 이질성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차별이나 격차는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동질성’이 높기 때문에 발생한다.
▶ 247P
쉽게 아는 것은 과거의 지각 틀을 그대로 늘려 가는 효과밖에 가져다줄 수 없다. 정말로 자신이 바뀌고 성장하려면 아니아하게 ‘알았다’고 생각하는 습성을 경계해야 한다.
▶ 271P
[이 책의 가독성: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