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남사친이 있으면 좋겠어
이상주의적인, Open창
#1. 번개 모임의 결말
(번개) 금요일 저녁 시간 되는 사람 손!
대학원 동기 단톡방이 띠링 울린다.
난 가능!
연말이고 해서 반가운 마음에 답을 남긴다.
톡방에 메시지를 아직 읽지 않은 사람 숫자가 하나씩 줄어져 가는데 반응이 영 시원찮다. 먼저 한 명이, 아쉽지만 못 가요. 하고 답을 남기기 시작하니 줄줄이 안된다는 답이 이어진다. 참석자는 번개 주선자와 나. 둘만 남았다.
이 모임. 가야 하나?
주선자 오빠 SJ는 같이 듣는 수업에서 느닷없이 나를 수업 반장으로 추천했다. 첫 시간 자기소개 때 그 수업 수강생 중에 모르는 얼굴이 없어서 친숙하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때문인가. 갑작스럽긴 했지만 반장 역할이 큰 부담이 없을 걸 알았기에 흔쾌히 그러겠고마 했다. 그 이후부터 우리 동기 모임은 점점 끈끈해졌다. 동기 대부분이 그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토요일 수업 이후 자주 학교밖에서 우리끼리 3교시를 하곤 했다. 나중에 왜 나를 추천했냐고 물었더니 동기들 중 홍일점이라 혹시라도 부담을 가질 것 같기도 해서 같이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했다. 만약 반장이라는 감투가 없었다면 아마 이렇게까지 3교시에 참석할 필요도 의지도 없었을지 모른다.
SJ는 자기가 나를 반장으로 추천해 놓고도 혹시 내가 그 역할에 부담을 가질까 항상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이야기해 줬다. 물론 좀 귀찮은 일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분위기를 살피며 따라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주도하는 편이 난 더 좋았다. 그리고 마음을 써준 SJ가 고마웠다. 이렇게 나름 한 학기 동안 친해진 SJ 긴 하지만 둘이 만나는 건? 고민이 되었다. SJ가 불편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SJ가 나랑 둘이 보는 걸 어색해할까 봐서였다. 나는 남자들을 안다. 남자들이 이성과 단둘이 만날 때는 상대에게 관심이 있는 경우뿐이다. 그날 번개는 어떻게 됐냐구요? 4명이 같이 만났다.
JS는 여자와 남자가 친구가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거 진~~ 짜 철학적인 문제다! 너~~
한명은 뒤에 숨었지만 자세히 보면 젓가락 4개 맞다.
#2. 남자는 이성을 친구로 만나지 않는다.
대학 시절 경험으로 터득한 나만의 명제다.
나름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고 자리 잡은 생각이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 주관적인 판단임을 미리 밝힌다.)
나 같은 공대 아름이가 남자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 이성이라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열어둔 채 만나기 시작하면 일상생활이 아주 불가능해진다. 대학 때 입학동기, 조별 동기, 동아리, 고시반, 스터디모임 모두 통틀어서 4년간 가까이 지낸 여학우는 해봤자 겨우 20명 남짓이다. 예비군 소집 날 수업은 휴강했고, 졸업 단체 사진 맨 앞줄에는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여학우가 교수님 옆에 주르륵 섰다. 입사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부서에 여사원은 나 포함 많아야 2~3명이다. 내 인생에 남자는 말 그대로 그냥 사람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남사친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
나와 JW는 동아리 친구였고 어느 날, JW가 자기 친구를 나를 만날 때 데리고 나왔다. 이후 우리는 셋이 자주 만나 놀았다. 셋이 영화도 보러 다니고 술도 자주 먹었다. 처음부터 전혀 썸 타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오히려 찐친이 되었다고 느낄 때쯤이었다. 내가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이야기하고 나서 우리의 다음 영화 약속이 아무 이유 없이 깨졌다. JW에게 물었더니 나보고 진짜 몰랐느냐면서 그 친구가 나한테 관심이 있다고 해서 자기가 데려왔던 거였단다. 진심으로 충격받았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연락이 끊긴 건 그 애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상대 마음을 알고 만났던지, 모른 채 만났는지는 상관없다. 결과적으로 내가 잠깐이라도 친해졌다고 믿었던 남사친은 모두 오래지 않아 연이 끊기고 말았다. 남는 남자 인연은 단체 모임뿐이다. 그나마도 그 안에서 누군가를 사귀었다가 헤어지고 나면 그 모임도 자연스레 나가지 않게 되었다.
이 지점이 바로 가슴 아픈 결말이다.
난 대학 시절 남아있는 친구가 별로 없다.
(끝까지 모를 뻔했지만, JW라는 친구도 처음에 나를 여사친으로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고 했다.)
#3. 그래도 남사친이 있으면 좋겠어.
나는 완벽주의자에 가깝다. 스스로 세워둔 도덕적 기준이 높은 편이다. 애초에 남사친은 불가능하다는 신념을 가진 터라 비지니스가 아닌 한 둘이서는 웬만하면 만나지 않는다. 특히, 오래도록 만나고 싶은 좋은 사람이 있는데 남자라면 오해할만한 행동이나 말은 더더욱 삼간다. 썸 보다는 계속 볼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잃은 건 대학 친구들만으로도 족하다. 남편이 이 글을 볼 거라는 가정 하에 확실히 해둘 필요도 있다^^
하지만 어떤 때는 꽤나 애매하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스무 살의 호르몬 넘치는 대학생들이 아니다. 상대는 전혀 아닌데 나 혼자 철벽을 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여러 상황과 맥락이라는 건, 나한테 연락한 이유가 뭐예요?라고 묻기에 항상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프로젝트로 우리 회사에 들어왔었던 JK라는 분이 신년 인사를 해왔다. 때 되면 으레 안부 인사를 전하던 분이라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근황을 전하다가 기회 되면 보자고 으레껏 이야기를 했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를 했다. 새해 소원을 빌었냐길래 그랬다고 했고, JK는 못 빌었다고 해서 이제라도 빌라고 했다. 근데 소원이 나랑 친해지는 거라고 한다. 내가 예쁘고 매력 있다는 칭찬을 한다.
오해될 수 있으니 그런 칭찬은 말라고 했다. 무언(無言)은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니까. 비지니스 관계이니 무안하지 않을 것 같은 선에서 응수했다.
정말로 나랑 친해지고 싶다고 하는데 혼자 철벽치고 남사친을 만들 기회를 놓치는 것인가, 아니면 경험으로 터득한 명제, 즉, 남자는 이성을 친구로 만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될까.
남사친 만드는 방법이 정녕 없는 거라면 너무 슬픈데 누가 방법을 아는 분 계시면 알려줄 수 있나요.
이 기회에 올해 소원을 하나 추가해 볼까.
진짜 남사친 만들기요!
(너무 이상주의적인 소원은 아니겠죠)
너무 이상주의적인 소원은 이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