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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제인 Apr 27. 2023

일고집, 사람고집

오류의 개인화


고집(固執)

1. 자기의 의견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 굳게 버팀.
2. 마음속에 남아 있는 최초의 심상이 재생되는 일.


어떤 경험으로 자기의 오류를 발견했을 때 사람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경험을 업데이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류를 통해 발전하는 것과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의 선택은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 답은 오류의 개인화 여부다.






"나 더 이상 느이 아빠랑 못 살겠어야. 나이 들수록 으찌 이래 고집만 더 쎄지는가, 아마 본인도 자기 말이 틀렸다는 건 다 알고 있을 텐디 ~대로 인정을 안 해야, 인정을. 자기가 잘못했다고 한마디만 해불믄 상황이 이래 될 일도 없을 거 아니냐."



20년째 같은 레퍼토리로 다투는 엄마아빠다. 내 보기에 아빠 고집은 방어기제다. 엄마는 아빠가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라지만,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아빠 자존심은 무너진다. 상대방은 늘 맞는 말만 하는 것 같고 나는 매번 실수만 한다. 처음에는 아하! 하며 행동을 수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복되면 슬슬 자존심이 상한다. 한번쯤은 내가 맞는 것 같기도 한데 그동안 학습된 대로라면 또 내가 틀린 것 같다. 주위사람들도 내가 틀렸다고 한다. 아빠는 외롭다. 내 편을 들어줄 누군가가 한 명이라도 있기를 바란다. 그게 내 아내이길 바라지만 늘 앞장서서 내가 틀렸다고 하는 사람이 바로 아내다. 이렇게 몇 십 년을 살면 아빠한테 옳고 그름을 가리는 건 의미가 없다. 엄마는 아빠 고집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고, 아빠는 내 말을 자꾸 무시해서 못 살겠다고 한다.


엄마아빠의 싸움은 평생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엄마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아빠의 행동을 수정하는 것은 오류를 인정하는 것, 즉, 그 오류로 인해 나를 상처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상처를 받는 포인트가 다 다르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아도 나한테는 안 괜찮은 게 있다. 남들은 괜찮지만 스스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개인적인 이유"라고나 할까. 휴직 전에 나에게도 그런 사건이 있었다.


내 일은 문서작업이 많았다. 임원들에게 이것 좀 사는데 돈 좀 쓰겠습니다. 하는 보고 자료였다. 일이 많아지고 예산이 커지자 일의 프로세스가 정교해지고, 최종 보고 전에 거쳐야 하는 중간검토 과정도 복잡해졌다. 새로 온 기획 부서 담당자는 내가 만든 자료를 글자색깔, 자간부터 용어, 디자인까지 세세하게 지적했다. 최초에 내가 만든 자료는 의미가 없을 정도라, 이럴 거면 네가 만들지?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그 사람의 단골멘트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였다. 처음엔 그래. 듣는 사람 관점에 맞춰봐야지, 하며 네네, 그럼 원하는 대로 바꿔볼게요. 했다. 문제는 그렇게 바꾼 자료가 최종 임원보고 때 빨간 줄이 찍찍 그어지고 원래 내 자료로 복구되는 경험의 반복이었다. 중간검토 때문에 최종보고가 한 주 두 주 밀리고 최종보고 때 깨치고 또 작업하느라 일이 끝나지 않았다. 중간검토 자리에서 무례한 그의 언행은 갈수록 도를 넘었다. 그는 나의 고집을 무너뜨리고 일에 대한 자존심까지 무너뜨렸다. 더 이상 그 사람은 상대조차 하기 싫다는 고집. 내 일고집은 사람고집이 되었다.


어휴,
모모 씨 고집 진짜 세네!

이후, 나는 그 지적한 사항에 절대 응하지 않고 그 말이 맞든 틀리든 내 주장을 관철했다.





나는 아마 그때 외로웠을 것이다. 팀장도 자초지종은 상관없고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일의 책임을 가진 팀원의 일머리보다 중간 검토자의 주장이 우선이라는 팀장의 태도도 참기 힘들었다. 정말 나의 일머리의 한계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의 내 한계는 누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내 오류는 개인화되었기에 발전의 계기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일고집은 자부심이다.

하지만 사람고집은 방어기제다.




이 글의 시작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배우고 기억하는가"라는 책이다. 이 책의 메시지는 사람이 뭔가를 배우려면 오류를 개인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뇌는 오류를 받아들일 때 세타파가 나와서 새로운 정보를 동화시키고 집중을 이끈다고 다. 반면 오류를 무시할 때는 베타파가 나와서 뇌에게 굳이 생각을 수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현재상태 유지' 신호를 내보낸다고 했다.




글을 쓰는 동안 당시에 느낀 강렬한 베타파가 다시 솟아난 듯, 감정이 너무 격앙되어 버렸다. 이미 지난 일이라지만 생채기난 마음은 아직 그대로 인가보다.  글을 쓰면서 그때 나의 상처를 보듬게 된다. 미처 알지 못했던 감정도 알게 되었다. 오류를 발견했을 때마다 그로부터 매번 나를 성장시키는 것은 때론 어려운 일이다.


앞으로는 사람고집이 문득 생기려고 할 때 내 양 어깨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끌어안아줄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 베타파에게 조용히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않아도 돼.
그럴 수 있어. 모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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