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12
평점 ●●●●
무라카미 하루키.
대단하고 유명한 작가이지만 학생 시절 내 기억 속의 하루키의 소설들은 외설적인 표현들이 유난히 기억에 남아 있다. 도서관에서 집어 든 하루키의 소설책 기둥에는 유난히 거뭇거뭇한 손때가 집중된 페이지들이 독자들을 유혹하는 듯했다.
그런 그의 작품 중 여행 에세이가 있는 줄은 몰랐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여행지를 소개하는 가이드북 부류의 책은 그 지역을 여행할 계획이 있어도 읽지 않는 편이다. 대신 그 지역을 여행했던 작가 개인의 취향 범벅인 이런 책을 좋아한다. 유명한 관광지의 느낌보다, 오히려 여행지에서 너무도 일상적인 감상이 담겨 있는 이런 책 말이다. 게다가 하루키의 입담을 직접 듣는 듯 괜스레 킥킥대게 된다.
내가 그러고 있으니 첫째가 "엄마 뭐가 그리 재밌었어?" 하며 궁금해한다.
하루키의 작가로서의 인생. 글쓰기에 대한 가치관. 음악, 책, 포도주, 여자로 대변되는 극명한 취향. 그리고 무엇보다 생계 걱정 없이 살아온 작가로서의 인생과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이건 여행이라기보단 타향살이 같은 거였다. 순전히 글쓰기에 유리한 조용한 비수기의 그리스, 이탈리아에서 거주하면서 글이 하나 마무리되면 근처를 여행한다. 이탈리아에서 차까지 샀으니 이 정도면 여행이 아니라 이사를 간 거라고 봐도 될 것 같다.
한마디로 직업상으론 비즈니스 출장 비슷한 거다. 게다가 거기서 상실의 시대를 집필하고 대박을 쳤으니.
그 외에도 몇 권의 책과 번역, 칼럼들을 쓰면서 유명한 글들이 탄생하는 과정을 소설 밖의 3인칭 시점으로 보는 듯하다. 37세에 시작해 마흔이 될 때까지 타향살이를 하다 일본으로 돌아와서 한 마지막 멘트에 잠시 내 나이를 의식하게 된다.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재미있는 경험을 했지만 그런 유동적인 삶에 어느 정도 지쳤고 이국땅에서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리 젊지도 않다
지금의 나도 하루키의 그때 나이가 되었다. 어렸을 때는 겁 없이 이민도 가고 자유롭게 "유동적인" 인생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이제는 부인할 수 없다. 나의 생활 반경, 선택지가 점점 줄어들어 가는데 오히려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 변화가 두려워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