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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제인 Sep 29. 2022

딸아, 공부는 못해도 그 당당함은 잃지 말거라

자신감이라는 마음의 방패

첫째 딸내미는 공부 알레르기가 있다.

제발 부 없는 세상에서 고 싶단다.

문제집 틀린 문제를 고치는데 한참이 지나도 다 했단 말이 없길래 보니 제 머리 속에 들어있는 생각들을 모조리 꺼내놨다.


보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공부 빼곤 다 좋아

10분이면 끝낼 분량도 아무 말 않고 있으면 한 시간은 금방이다. 엄마 아빠는 매일 같이 잔소리다.


너, 멍 때리고 있지 말고,
할 것 빨리빨리 하고 나서 맘 편히 놀라고 했지?
빨리 끝내고 놀면 얼마나 좋아."


혼내도 보고, 얼래도 보고, 물질적인 보상도 해보고, 칭찬으로 자신감도 줘보고. 별 방법을 다 써봐도 오히려 갈수록 뻔한 레퍼토리라는 듯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내공만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애타는 건 부모 마음뿐.


자식은 어쩔 수 없다더니, 지금부터 이러면 나중엔 어떨지 벌써부터 걱정과 한숨만 늘어간다.



남편은 자극 요법 담당이다.

너 이렇게 하면 나중에 바보 된다.

너 수업시간에 맨날 졸고 있지.

학원에서 네가 젤 못하지.


점점 뒤떨어져 가는 현실을 직시하고, 부정적인 상황을 최대한 회피할 수 있도록.


나는 칭찬 요법 담당이다.

우와, 전에는 50점 맞았는데 이번엔 70점이네?

예전 방식이 너한테 잘 안 맞았었나 보다.

이것만 기억하면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넌 이건 좀 부족하지만 다른 건 다 잘 하잖아.


아이가 벌써부터 스스로를 낙제아 수준으로 인식하지 않도록. 순전히 안 해서 그렇지 못하는 게 아니라는 자신감을 주고 싶은 엄마 마음이다.



몇 달 전, 이 방 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학교 영어 단어 시험지를 발견했다. 10문제 중에 동그라미는 3개뿐.


아.. 이럴 수가.

갑자기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려왔다.

나 닮았으면 이럴 리가 없는데 ㅋㅋㅋ


오늘 아침에 영어 단어 시험 볼 것을 테스트했더니 12문제 중에 6문제를 맞았다. 어라? 잘했네?

대감이 없다는 것의 장점이 이런 거구나 ㅋㅋㅋ




"나답다"는 인식은 굉장히 개인적 일 것 같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주변의 평판과 말에 영향을 받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난 맨날 30점 맞는 사람이야.라는 인식이 박혀 있으면 그 이상은 할 수 없다고 믿게 된다.

더구나 그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계속 같은 말을 하면 그 인식은 정말 객관적인 사실이 되어 버린다.


최악인 것은 실제로 나는 80점을 맞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어 왔어도 주변의 평가나 분위기가 그게 아닌 상황이 지속되면  자존감이 닥을 치게 된다는 것이다.


나 원래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구나


아직 성장 가능성이 무한하고, 판단능력이 미흡한 어린아이에게는 섣불리  평가절하하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굳게 믿는 이유이다.




심지어 어른인 나도 최근에 절실히 경험을 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게 되는 그런 경험을.


나는 어려서부터 시험과 평가에 최적화된 아이였다. 객관적으로 판단되는 대부분의 것들 - 시험 점수, 출신 학교, 회사, 연봉 등 - 에서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내가 부족한 부분은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고, 항상 겸손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나이지만 내가 일을 잘못한 거라고 지속적으로 지적하는 상사와, 틀리다고 생각해도 응당 맞추면서 사는 게 맞는 것 같은 분위기에서 오랫동안 있다 보니, 못 버티는 내가 잘못된 것인가, 정말로 내가 부족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소위 말하는 가스 라이팅이었던 것 같다.


최근 그 상황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게 되니 조금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면서 알게 된 건 부족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연초부터 오랫동안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상담사님이 늘 했던 말씀이 늘 그거였는데 왜 그때는 그 말을 믿지 못했던 걸까. 스스로 과하게 내 자존심을 깎아 먹고 있었다는 걸.



자존감과 자신감은 스스로 지키는 거라고 하지만, 주변에서 뭐라 해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그걸 지킬 줄 아는 마음의 근육을 키워주는 말과 생각 습관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공부 좀 하라는 수없는 잔소리에 오늘도 딸내미는 깨갱은 커녕 오히려 큰 소리를 친다.


포기하면 편해요, 아빠.
저도 하면 잘할 수 있다구요!!


휴, 그래.

공부 못해도 되니까 그 당당함만은 잃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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