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과 필리핀으로 휴가를 갔다가 태풍을 제대로 맞았다.강풍에 숙소 입구 유리문이 박살이 날 정도였다.
태풍 맞은 보라카이의 크리스마스
당시 숙소 예약은 처음 며칠만 해둔 상태였는데, 교통과 통신이 두절돼서남은 기간 현지 숙소를 예약할 방법이 없었다. 비와 바람을 뚫고 여기저기 호텔을 찾아다니며 남은 방이 있는지 수소문하면서 하루를 몽땅 버리고묵을 방을 겨우 찾았다. 그것도 비싼 값에. 지나고 나니 추억이 되었지만 당시 난 굉장히 안절부절못한 상태였다.
숙소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회사 연락을 받을 수 없게 되서였다.
직업 특성상, 밤낮이나 휴일 상관없이 연락이 닿아야 했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 보니 그런 업무 특성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전화와 메시지를 꼭 확인해야 한다는 강박증까지 생긴 상태였다.
한밤 중에 자다 깨서 잠긴 목소리로 무심결에 전화를 받았는데 긴급한 목소리들과 소음이 뒤덮인 컨퍼런스 콜이었다거나,
퇴근 이후 씻느라고 팀장 전화를 못 받은 동료가 그 다음날 호되게 질타를 받는다거나,
업무 알람 문자에 대응이 부족했다며 혼나는 일이 빈번했다.
이후 회사 전용 메신저 앱이 생겼고,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수십 개의 톡방과 업무 메신저가 업무 상황을 점점 더 신속하게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동일 업무에 대화방 멤버만 조금씩 다른 톡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대화의 흐름을 조금만 놓치면 과거 버전이 되어 버리는 속도 또한 빨라졌다.
회사 메신저 앱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용 형태가 점점 복잡해졌다.
팀장이 없는 실무자 단톡에서 논의해야 할 일과, 개인 톡으로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구별돼서 점점 의사소통이 복잡해졌다.혼돈은 그대로 업무에 영향을 미쳤다.회의 중에도 톡으로 업무상황을 공유, 보고, 지시,정리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일을 처리해야 할 정해진 단계, 적절한 방법, 협의 순서 같은 것들을 재빠르게 계산해서 맞는 톡방에 글로 전달해야 한다.여러 메시지 중에 직책자가 포함된 방에 가장 먼저 응답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생각의 흐름은 점점 느려져서 스스로 의식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난 어느 정도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편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리스크를 판단해서 긴급한 것과 중요한 것 사이에 결정을 내리는 게 점점 어려워졌다. 한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도 희미해져 갔다. 나름 멀티태스킹의 귀재라 생각했던 나였는데 날이 갈수록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지나가 버리는 듯한 느낌이 커져갔다. 어떤 일도 시작과 끝이 없는 그런 느낌.
집에 오면 컴퓨터나 핸드폰은 쳐다도 보기 싫었고, 전화나 메시지 알람을 몸이 본능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비극적인 것은 가족들에게 걸려오는 전화나 메시지조차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화가 오면 거절하거나 바쁘다며 끊었다. 부모님이 인터넷이 어렵다며 필요한 물건 하나 주문해 달라고 하는 것조차 "일"로 느껴졌다. 아이들 학습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최근에도 핸드폰 메시지가 울리면 내 가슴도 같이 뛴다.조급증이 나서봤을 때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그대로 지나가 버릴 것 같다. 원래 하고 있던 일과 새로 비집고 들어온 생각이 뒤엉킨다.
집안일에서도 분명 뭔가를 하러 안방에 가던 길이었는데, 현관에서 안방까지 가는 동안 뭐가 보이면 바로 context switching*되고 일은 후입 선출* 방식이 된다. 그리고 나선, 뭘 하러 가는 길이었는지 잊어버렸다.
* Context switching : 전문 컴퓨터 용어로 다중 프로그램 작성 환경에서 어떤 프로그램의 실현을 중단하고 다른 프로그램의 실행으로 환경이 바뀌는 것.
* 후입 선출 : 나중에 들어온 일이 먼저 처리되는 방식. 선입선출의 반대말.
그때부터 살기 위해서 명상과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좋았다.
하지만 일에 대한 조급증과 연락에 대한 강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회피 반응은 점점 더 심해졌다. 일부러 메시지를 안보거나, 응답을 하지 않게 되었다.
다른 일을 하게 되더라도 나는 이걸 극복하기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든다. 전화 연락과 메신저가 없을 수 있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