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바로 나
몇 해전, 자페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천재 신입 변호사의 이야기를 담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방영됐다.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를 반영한 K-따뜻함이 녹아난 이야기가 제대로 해외의 시청자를 마음을 저격했는지, 한국을 넘어 미국, 유럽 등지의 다수의 나라에서 꽤 큰 호응을 얻었다. 보통 이렇게 한 장면 한 장면이 마음을 울리는 작품의 경우 사람마다 느끼는 감동 포인트가 달라 꽤 많은 장면이 최고로 꼽히고는 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드라마는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나를 말한다. 아니, 사실 신기할 것도 없다. 누구든 이 장면에서는 가슴이 울렁거리기 마련이니까.
극 중 영우는 자신에게도 별명을 지어달라며 '최고미녀', '최강동안'을 예시로 드는 로스쿨 동기 최수연에게 넌 그런것이 아니라는 단호한 대답을 한다. 순간 시무룩해지며 그럼 뭔데, 하는 수연의 모습은 귀여운 투정처럼 느껴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벼운 웃음을 짓게한다. 언제나 바르고 정확한 영우답다는 생각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시청자들의 방심하고 풀어진 마음을 울리는 말이 이어진다.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로스쿨 다닐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너는 나한테 강의실의 위치와 휴강 정보와 바뀐 시험범위를 알려주고, 동기들이 날 놀리거나 속이거나 따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지금도 너는 내 물병을 열어주고, 다음에 구내식당에 또 김밥이 나오면 나한테 알려주겠다고 해.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야." 사진 및 대사 출처: ENA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이 장면이 드라마 전개 초반에 공개됐다면 '최수연은 착한앤가보다'라는 캐릭터 설명쯤으로 치부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시청자들은 이미 영우와 주변인물을 7시간 가량 지켜보았고 충분히 어떤 인물인지 파악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영우의 무미건조한 말투에 담긴 깊은 진심을, 일렁이는 눈으로 아무말 못하던 수연과 함께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극 중 캐릭터가 너무 강렬해서 본명을 잃어버린 꽃보다 남자 가을양(김소은), 도깨비 파국이(김병철), 더글로리 전재준(박성훈) 등 많은 한국의 배우들처럼 배우 하윤경은 이 짧은 장면 하나로 '봄날의 햇살'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대사에 담긴 수연의 행동들은 행동의 당사자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스쳐지나갈 정도로 소소하다. 하지만 그 작은 위로들이 영우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였고 그 결과 영우에게 수연은 그저 존재만으로도 포근하고 따뜻한 봄날의 햇살이 되었던 것이다.
수연의 감동을 함께 느끼는 동시에, 영우가 수연에게 받았을 위안도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해도 삶에서 힘든 일을 마주할 때마다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주길, 우리 모두는 간절히 바란다. 거창하거나 대단한 도움까지는 필요하지도 않다. 그저 누군가의 선함에서 기인한 별 것 아닌 한 두마디가 절실할 뿐이다. 주저 앉은 내 눈앞에 보이는 건 높은 담장 뿐일지라도 내 옆을 스쳐 걸어가는 저 사람은 담장 너머에 뭔가 다른 것을 보고 있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일상적이고 별 거 아닌 말.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담장 아래 웅크린 그림자에 관심이 없다. 살기 팍팍한 사회 속에서는 작은 말 한마디 조차 기대하기 어렵다. 꽤 오래전의 나는 막막한 기분이 들 때마다 그 별거 아닌 한마디 정도는 건네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렇게 다짐에 다짐을 했던 나마저도 삶에 치이다 보니 그런 생각을 했던 날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잊고 지냈던 것 같다. 하지만 과거의 나에게는 그 작은 다정함이 정말 많이 간절했었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들에도 그런 사람으로 살고자 노력을 해왔었나보다. 여느 때와 같이 동료 직원과 대화를 나누던 어느 날 내가 마치 '그' 봄날의 햇살같다며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그 직원이야말로 봄날의 햇살같은 따사로운 사람이었기에 별 뜻 없이건넸을 수 있지만 어찌되었든 힘든 시간을 보내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감사했다.
또한 이로 말미암아 예전의 내가 했던 다짐이 다시 생각났고, 비로소 나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나는 모두에게 호감을 주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므로 항상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를 어느정도 받으며 살아왔다. 거기에 더해 직장생활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이 너무 이상해서, '주변 사람이 다 또X이 같으면 네가 또라X'라는 말처럼 혹시 내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마음 한켠에 깊게 뿌리내려 있었다. 가끔가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 말을 해주는 사람이야말로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별 뜻 없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봄날의 햇살이라는 그 말을 들은 그 시점에, 나도 이제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마도 내가 건넨 소소한 말들로 위로받은 많은 사람들의 대답이 내 안에 쌓여왔고, 나에게 굉장히 강렬하고 상징적었던 봄날의 햇살이 제일 위에 놓임으로써 비로소 확신이 되었으리라.
나이 앞자리가 3으로 바뀌고 나서 계속 나를 따라다니던 '내 알맹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30대가 되었다고 뭔가가 달라졌을까?'하는 의문은 이렇게 조금씩 해소가 되고 있다. 새로운 도전을 앞둔 지금, 삶의 여러 측면에서 조금은 덜 흔들릴만한 단단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내 아래 묵직하고 든든한 나에대한 믿음을 깔고, 지난 주말! 드디어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다. 나 진짜 갑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