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으로 가는 길

by 블러드 피치

오늘은 보슬보슬 비가 옵니다.

코발트색 자동 우산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도서관으로 가는 길을 떠올립니다. 집에서 도서관까지 걸어가는 길은 제 나름의 여러 코스가 있는데요. 무슨 둘레길도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소개해 볼까요?

A 코스는 제가 사는 아파트 101동에서 107동까지 지하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길 건너편에는 유명 슈퍼마켓 체인이 입주한 쇼핑센터가 있어 급하게 식료품을 살 때 이용하기도 하지만, 지하 주차장의 텁텁한 공기를 마셔야 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B 코스는 조경이 잘 된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여름에는 어린이 물놀이장으로 변신하는 자그마한 공원을 지나쳐 가는 길입니다. 봄, 여름에는 푸릇푸릇한 이름 모를 식물들과 꽃들이 눈을 즐겁게 하고, 옷을 갈아입는 가을, 겨울에는 고요하고 평온한 분위기가 좋아 매력이 넘치는 코스입니다. 다만, 내리막길과 계단이 많아 힘이 좀 듭니다.

아파트 남문으로 나와 큰길을 따라 걷는 C 코스는 상점가를 관통해서 가는 길이라 볼거리가 아주 많습니다. 대학가 근처라 프랜차이즈 매장이 많고, 폐업하거나 개업하는 상점의 순환 주기가 짧아 변화를 살피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이 코스로 도서관을 가려면 딴짓하느라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그래서 오늘은 A 코스인 거죠. 비를 가장 덜 맞을 테니까요.



퇴직하고 나니 매일 매일이 일요일 같은 달콤한 게으름이 찾아왔습니다. 온종일 누워서 빈둥거리고, 졸린 눈을 비비며 밤새워 드라마를 보고, 낮부터 와인을 마시는 호사스러움에도 빠졌습니다.

‘나는 천생 한량이 체질인가 봐~!’

그렇게, 오래도록 지켜왔던 직장인의 일상 루틴을 무너뜨리며 5월이 가고, 6월이 가고, 7월도 가고…. 나이가 들어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낯선 손님처럼 불현듯 찾아오기 전까지는 먹고, 놀고, 자는 일에 충실했습니다.

어느 날 새벽, 아직 동이 트지도 않은 새벽에 말똥말똥 눈을 껌뻑이며 그 낯선 손님을 맞았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흥미로운 일도 없는데, 뭐라도 배워야 할까? 그러나 혼자서 쭈뼛쭈뼛 낯선 공간과 사람들 속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용기가 없고…, ‘그래, 내일부터 도서관에 가자!’ 땅! 땅! 땅! 그것이 저의 도서관 생활의 시작이었죠.

도서관은 심리적 거리감이 없고, 책이나 잡지는 물론 영화나 음악감상도 할 수 있어 퇴직자들이 혼자 놀기엔 안성맞춤인 곳입니다. 처음에는 책을 한두 권씩 골라 대출해서 도망치듯 집으로 들고 왔었는데, 점점 도서관이 익숙해지면서 제가 마음 편히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기고, 그곳에서 머무는 시간도 길어졌습니다. 이제는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도서관에서 읽고 더 보고 싶으면 집으로 가지고 오는 식으로 바뀌었죠.

책에 굶주린 사람처럼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새로 들어온 책이라, 베스트셀러니까, 다시 읽고 싶어서, 내용이 기억 안 나서…, 그렇게 처음 읽는 책도 있었고, 읽었던 책을 또 읽기도 하며 퇴직 후의 생활 리듬을 도서관에서 찾았지 뭡니까.

그러다가 저만 알고 읽기 아까운 책, 추억이 담긴 책처럼 '나의 책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제 글을 읽고 독자 여러분도 자신만의 책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소개한 책 중에 한 권이라도 마음에 드시는 책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고요. 그럼, 이제 저의 책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