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원짜리 드라이브가 가르쳐준 '인생의 적기'
6년 전 처음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체력장 이후, 출근버스를 타기 위해 전력질주한 것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뛰게 된 것이다. 불어나는 체중을 막기 위해 많은 시도와 실패를 반복하다 결국 그토록 싫어했던 러닝까지 간 것.
그땐 꾸역꾸역 어쩔 수 없이 달렸다.
AI러닝 코치의 가르침을 새기고 '살 빠져라'주문을 외우며.
다시 달리기를 시작한 건, 3년 전.
이제 나의 달리기는 다이어트와 건강을 넘어 달리는 행위 그 자체에 더 비중이 있었다.
야외 달리기를 좋아하는데, 달릴 땐 이어폰도 꼽지 않는다. 달리는 순간 바쁘게 돌아가는 내 몸을 느끼는 것이 내가 달리는 이유랄까.
두 발은 바닥의 상태를 고르며 보폭과 강도를 조정한다. 팔은 그 리듬에 맞춰 적당히 앞뒤로 흔들린다.
내 머릿속은 그날의 코스를 그려보며 거리를 계산한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들을 그대로 흘려보내기도 하고 때론 하나를 오래 붙잡아두기도 하고.
공원의 나무와 숲, 작은 호수 그리고 거리의 사람들이 풍경이 되어 내 곁을 스친다.
그 풍경을 쫓느라 내 눈도 바쁘게 움직인다.
그때 소리가 들린다.
바람소리, 새소리, 자동차의 경적소리, 나를 스치는 사람들의 말소리, 발소리 그리고 숨소리.
그 모든 게 하나가 되어 나를 달리게 한다.
그러다 마라톤도 뛰게 됐다.
남편, 아이들과 함께 5km 가족 마라톤을 뛰었다.
5km가 아쉬워진 우리 부부는 작년에 처음으로 목포까지 내려가 10km를 달리고 왔다.
족저근막염과 아킬레스건으로 늘 발이 아픈 나는 약과 파스로 무장한 채 10km 완주하고 돌아왔다.
올해도 마라톤에 참가하고자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세상엔 어찌나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은지 늘 신청마감.
그러다 극적으로 <여의도 벚꽃 마라톤 대회> 신청에 성공했다. 신청에 성공하곤 어깨가 어찌나 들썩이던지.
대회 당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여의도로 향했다. 우리가 그렇게 서두른 건, 주차장 때문이었다.
몇 번의 대회 참가를 통해, 주차장을 사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절감하고 있는 터였다.
몇 주 전부터 수시로 날씨도 체크하고, 그에 맞게 의상도 준비해 뒀다. 무릎보호대와 준비물들도 야무지게 챙기고, 전날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 두어 시간밖에 못 잤음에도 제때 일어나 계획대로 출발했다.
대회 장소와 가장 가까운 여의도 1번 주차장은 이미 만차일 가능성이 높아 제치고, 그다음으로 가까운 여의도 3 주차장을 목적지로 정했다.
모든 준비가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목적지 인근에 도착해 여의도 1번 주차장을 지나며 바라보니, 주차장이 한산했다.
이미 이 시간이면 그래도 차들이 꽤 늘어져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차가 없지?" 남편이 말했다.
"우리가 너무 일찍 왔나? 다들 대중교통으로 오려나 봐"
"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여의도 3 주차장으로 진입해, 대회장이랑 가장 가까운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배번호도 차고, 무릎보호대도 차고, 기록칩도 달고 막바지 준비를 하고 차에서 내려 대회장을 향해 갔다.
스트레칭도 하고 팔도 휘두르며 몸을 풀면서 대회장을 향해 걸어가는데,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
아직 추운 날씨에 한강공원은 한산하다 못해 적막이 흘렀다. 동네 주민 몇몇이 뛰거나 산책하며 지나갈 뿐.
풀장착한 무릎 보호대가 무색하게,
정적만이 가득한 길을 우리 둘만 씩씩하게 걸었다.
주변 풍경에 불안감을 느끼는 남편과 달리, 나는 의기양양했다. 역시 일찍 일어난 새가 먹이를 잡는 법. 곧 사람들이 몰려 주차자리를 찾아 헤맬 것을 상상하니 우리의 완벽한 계획에 심취해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그러던 남편이 드디어 내뱉고야 말았다.
"이상하네, 사람이 너무 없어. 오늘 맞아?"
"맞지! 3월 8일! 일. 요. 일......"
큰소리 떵떵 치며 날짜를 말하는 순간 느낌이 싸하다.
그렇다. 우리가 간 그날은 3월 7일 토요일이었다.
다음날은 아빠 병원에 면회를 가는 날.
마라톤이 토요일이라고 생각한 나는, 언니와 일정을 그렇게 정했다. 병원에 있는 아빠 생각에 마라톤을 뛰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런 내게 언니는 일상은 이어가야 한다며 토요일에 마라톤을 하라고 했다.
그런 마음으로 왔건만 날짜가 이렇게 꼬이다니.
거기다 10만 원이라는 돈도 날렸다고 생각하니 돈도 아까워 속이 상했다.
풀 죽은 내게 남편은 비싼 드라이브를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며 잊으란다.
좀 멋있어 보였다.
그 김에 우리는 산책도 하고, 맛있는 추어탕도 먹고, 소금빵 맛집에 가서 빵과 커피도 마시며 짧은 데이트를 즐겼다.
마라톤 대신 소금빵을 완주한 아침이었지만,
10만 원짜리 드라이브치곤 꽤 괜찮은 결말이었다.
나는 종종 이런 실수를 한다.
이런 실수를 할 때마다 나를 탓하기보다 속상하고 미안해하는 내 마음을 달래주는 사람들이 있어 고맙다.
하지만 이렇게 올해의 첫 마라톤은 뛰어보지도 못하고 끝났으니 아쉬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요즘 마라톤이란 내가 뛰고 싶다고 뛸 수 있는 쉬운 이벤트가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나는 발이 늘 말썽이고, 신랑은 무릎이 말썽이다.
모든 것은 결국 타이밍인가 생각해 봤다.
'적기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하는 것 말이다.
좀 더 어려 여기저기 몸이 쑤시고 아프기 전에 뛰었다면 달리기는 좀 더 수월했을 텐데..라는 아쉬움.
하지만 그땐 세 아이들이 어려 아이들을 놓고 우리만 마라톤을 가는 건 불가능이었을 터.
결국 적기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때인 것 같다. 그것이 내 성에 차지 않을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가는 것.
그것이 나의 시간이려니 한다.
봄기운이 점점 강해진다.
봄을 온몸으로 맞으며 달리고 싶다.
마라톤 자리가 남은 곳이 없나 기웃대지만 나의 발바닥도 신랑 무릎도 심상치가 않다.
그래도 발바닥과 무릎이 완전히 파업을 선언하기 전까지는, 나는 계속 기웃거릴 것이다.
일단 당분간은 동네 공원을 산책하는 것으로 발바닥과 무릎을 살살 달래 보며, 나의 시간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