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속에 자란 나

미숙했던 나를 이해하며 어른이 되어가는 중

by 모모

나는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어가는 내 모습이 좋다. 재작년보단 작년의 내가, 작년보단 올해의 내가 더 마음에 든달까. 그런데 이 말은 달리 보면, 과거의 나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스스로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부르는,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시기가 있는데, 고2부터 시작되어 대학 시절과 사회 초년생으로 이어지는 그때가 바로 그 시기이다.


어렸을 땐 그래도 좀 야무지고 당찬 편이었던 것 같은데, 고등학교 2학년을 시작으로 마치 인생의 축을 놓은 사람처럼, 아무 생각도 고민도 없이 깃털보다 가볍게, 돌이켜보면 한심하게 하루하루 살아갔던 것 같다.

마치 그저 '태어난 김에 사는 사람'처럼.


그러다 내 한심함을 자각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난 아직도 그 일을 떨쳐내지 못한 채 25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마음 어딘가에 끌어안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


대학 3학년 때였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을 줄 알았던 교양수업에서 그다지 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서먹하지도 않은 과 선배 무리를 만났다. 아는 사람 없이 외딴섬처럼 지내던 터라 조금이라도 아는 얼굴을 만나 반가웠고, 그들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쉬는 시간엔 가끔 대화도 나누곤 했다.


그러다 조별 발표 수업을 하게 되었는데, 한 선배가 먼저 같은 조를 하자고 제안했고, 마침 아는 사람도 없어 애매하던 터라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발표 준비를 하던 중, 그 선배가 또 제안했다. “우리는 말주변이 없으니까, 네가 발표 좀 해주면 안 될까?”

나도 그렇게 많은 낯선 이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것도, 그 선배들의 성적까지 책임지는 것도 부담인지라 여러 번 거절했으나, “못해도 좋으니 그냥 발표만 해달라”는 부탁에 결국 마지못해 맡기로 했다.


발표일!

대규모 강의실, 수십 명의 청중, 거기다 내 입에 몇 명의 성적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하얘졌다.

잘해야겠다는 욕심이 지나쳤던 걸까.

극도의 부담감과 나를 바라보고 있던 조원들의 시선에 정신줄을 놔버렸던 걸까.

단상에 올라가 청중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아 모르겠다!' 한번 외치고,


열심히 하지 않기로,

아니- 그냥 아예 바보가 되기로 했다!


전날 밤까지도 좁은 하숙집에서 혼자 열심히 발표준비를 해오던 나였는데,

마치 뇌를 집에 두고 온 것처럼, 매우 한심한 모습으로 배시시 웃기까지 하면서 앞사람도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겨우겨우 발표를 마쳤다.

그럴 때마다 뒤에서 나를 어이없게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을 느꼈지만, 첫 한마디를 내뱉은 순간 나도 이미 후회를 하고 또 하는 중이었으나 수습하기엔 당시의 나는 너무 어렸고, 무서웠다.


당연히 결과는 처참했다.


너무 부끄러웠다. 한심한 나 자신을 도대체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그런 내 모습에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수업이 끝난 후, 그 선배가 다가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한테 정말 실망이다.”


그리고 휙, 돌아서서 가버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계단을 내려가며 세상이 온통 까매지는 기분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날 이후 나를 대하는 그 선배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차가움, 무시, 한심함.

누군가가 나를 칭찬하거나 호감을 보이면, 뒤에서 똥 씹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희는 쟤가 얼마나 한심한지 몰라.”라는 말이 그의 눈에 적혀 있었다.


몇 년이 흘러 나는 직장인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회의를 진행할 만큼 성장했다.

나는 더 이상 그날의 ‘한심하고 모자란' 내가 아니었다. 어느 날 회의를 마무리하고 회의장을 나서는데, 문득 그 선배가 떠올랐다.

이렇게 성장한 나를 그에게 멋들어지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 사건 이후로 20년이 또 지났고, 많은 일들을 겪으며 단단한 어른 되기위해 성장하고 있다. 그렇게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나를 느낄 때마다 아직도 한 번씩 그 선배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날, 나 자신을 원망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모든 화살을 스스로 나에게 돌리며 주눅 든 채 움츠려 냈던 어린 나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네가 한심해서가 아니야. 그저 경험이 부족던 거고. 잘하지 못해도 된다는 것을.. 그 두려움을 어떻게 떨쳐내야 하는 지를 랐던 것뿐.'


어린 나를 토닥여주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다독여도 결과는 같다.

여전히 난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 선배를 애타게 찾고 있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놓아버릴 수 없는 후회의 순간들이 있다.

부끄러움과 한심함을 넘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순간들.

하지만 그렇게 실패와 후회를 반복하며 우린 자신만의 속도대로 성장하는 중이라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완벽하지 못했던 날들도,

결국 나를 이만큼 자라게 한 시간들이었으니까.

나 자신만은 스스로에게 조금 덜 가혹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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