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N의 머릿속 이야기
어느 날 저녁시간,
각자 하루 일과를 이야기하던 중, 큰 딸이 갑자기 먼가 큰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엄마, N들은 머릿속에 항상 먼가 있다며?
상상이든 생각이든... 머리가 비어 있는 순간이 없대! 엄마 정말 그래?”
나도 놀랐다.
“응, 당연하지! 근데 사람의 머리가 ‘텅’ 비는 순간이 있다고?! 너넨 정말 그래?”
대문자 N인 나와 S인 큰딸.
우리는 서로의 세계가 너무 달라 한참을 웃었다.
나는 잘 때 말고 뇌가 쉰 적이 거의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남들보다 꿈도 많이 꾸긴 하는 것 같다. 잘 때조차 뇌가 멈추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난 사실 머릿속이 더 바쁘고 시끄러운 사람이다.
몇 개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막 한글을 배워 더듬더듬 읽기 시작할 무렵이니 6~7살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전엔 그림과도 같던 의미 없는 간판 글씨들이 이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읽어보려 했으나 내가 읽어내는 속도보다 버스가 달리는 속도가 빨라 간판 하나 읽기도 전에 버스는 앞을 향해 달려갔다.
그다음 보이는 간판을 읽으려고 했으나 또 실패다.
더 빨리 읽으려고 노력했다.
눈을 부릅뜨고, 버스보다 서너 간 판 앞을 미리 노려보고 시선이 닿는 순간 얼른 읽어내려고 온 정신을 집중했음에도 졌다, 또.
너무 피곤했다.
머리도 복잡하고 눈도 아파왔다.
무엇보다, 그렇게 애를 써도 간판 하나를 못 읽으니 정말이지 미치도록 답답했다.
하지만 오기가 발동했다.
버스가 달릴 때 간판 하나만 다 읽으면, 눈을 질끈 감고 이제 아예 창밖을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혼자 이를 바득바득 갈며, 창밖을 노려봤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간판이 술술 읽어졌다.
그때의 짜릿함과 쾌감을 난 지금도 기억한다.
그제야 난 편안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시 창밖을 보며 혼자만의 상상 속으로 빠질 수 있었다.
나는 그게 참 좋았다.
다시 온전히 상상할 수 있어서.
역시 6살-7살 혹은 그 보다 좀 더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엄마랑 언니랑 어딘가를 걷고 있었다.
당시 내 눈높이가 어른들 엉덩이쯤이었나 보다.
사람 붐비는 도심을 걷는데, 온통 어른들 엉덩이만 보였다.
순간 생각했다.
'누가 방귀를 뀌면 어쩌지?'
'사람들이 방귀를 뀌면 눈에 보일까?'
어떤 형태로 나올 것인지도 상상했다.
'똥색의 연기가 나오려나'
근데 나도 엄마아빠언니도 똥색 연기가 나온 적은 없었다.
'그럼 물이 끓을 때처럼 어른거리 듯 연기가 나오려나?'
왠지 그게 맞을 것 같았다.
난 집중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방귀가 나오는 엉덩이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방귀가 보이면 얼른 찾아서 피해야지!'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났다.
성인이 됐다고 달라지진 않았다.
대학 3학년 때, 말싸움을 못해 억울했던 일이 있었다.
말싸움을 잘해서 다신 그렇게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나는 상상 속에서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해서 혼자 싸우기 시작했다.
억울했던 그 상황을 수도 없이 되돌려, 하고 싶은 말을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받아쳤고.
드라마 속 상황을 연출해 또 수없이 싸웠다.
지나가다 보았거나 겪었던 일들에 양념을 치고 각색을 하여 또 싸웠다.
우와, 청산유수다.
진짜 머릿속 나 자신이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정의의 사도 같았달까.
몇 년이 흘러, 회사를 들어갔는데.
마침 내 사수는 말싸움의 달인이었다.
전혀 흥분하지 않고, 목소리 톤도 올리지 않고 침착하게, 하지만 상대방은 뒷목 잡게끔.
싸움 후 마무리까지 완벽해서 절대 상대와 척은 지지 않았다.
완벽했다.
난 그녀를 싸움의 스승으로 삼고, 유심히 관찰하고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퇴근길, 그 상황을 다시 연출했다.
주인공은 나, 난 낮의 그녀가 되어 말싸움을 했다.
마무리까지 멋있게.
수년간의 끝없는 연습을 거치고, 난 이제 말싸움에서 지진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말이다.
어쨌든 나는 혼자서도 참 잘 논다.
전혀 심심하지 않다, 아니 너무너무 바쁘다.
남들이 보기엔 멍하니 있는 것 같아도
내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장면이 이어지고, 대사가 흐른다.
추억을 곱씹으며 그때와는 다른 결말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다양한 일들을 풀어내보기도 한다.
지나가다 들리는 낯선 이들의 이야기로 뒷 이야기를 꾸며보기도 한다.
결국 내 머릿속 생각들이란 건...
맞다.
다 쓸데없는 생각, 잡념들이긴 하다.
나도 삶에 도움이 되는 '어른'의 생각으로 머리를 채우고도 싶었다.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마구잡이로 떠오르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니, 이마저도 참 재밌다.
남들보다 조금 바쁘고, 시끄러운 내 머릿속에서
나는, 오늘도 잘 논다.
지루해질 틈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