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우주가 된다는 것

2026년 2월 10일(화)

출산 후 3개월 만에 다시 회사로 향했다. 아이와 오롯이 함께하는 시간은 하루 서너 시간 남짓. 많은 워킹맘이 아이를 떼어놓으며 미안한 마음이 든다지만, 사실 나는 회사에 나가는 것이 좋았다. 사람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 식사 후 마실 수 있는 커피 한잔의 여유가 소중했다.


워킹맘일지라도 당당하게 육아하려 노력했다.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아이에게 집중하며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마음 한 편에는 늘 묵직한 걱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이의 투정이 유독 심한 날, '엄마 싫어! 엄마 가!'라는 말을 내뱉을 때면, '애들은 다 그래'라고 넘기다가도 혹여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해 애착 관계에 빈틈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아윤이는 원래 엄마와 잘 떨어져 있는 아이라 생각했다. 할머니 집에서도 나를 찾지 않고 의젓하게 놀았고, 퇴근이 늦어지는 날에도 시간을 잘 보내고 있다고 믿었다. 낯선 체험 수업도 서슴없이 참여해 왔기에 걱정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 부쩍 '엄마 껌딱지'가 된 기분이다. 어딜 가나 나를 찾고 할머니 집에서도 종종 엄마를 찾는 말을 들으면, 혹시 애착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분리불안이 온 건 아닐까 생각이 많아지기도 했다.



예전에는 일회성 체험 수업만 듣다가 이제 정기적으로 발레와 동요 수업을 시작하면서 그런 생각들이 더 자주 들었다. 처음 동요 수업에 가던 날, 내가 동행했을 때는 제집처럼 활기차게 노래를 부르던 아이가 그 이후부터는 단 한 번도 울지 않고 수업에 들어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수업부터는 할머니가 데리고 가셨는데, 수업 시간이 훌쩍 넘은 시각이면 어김없이 전화기가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윤이의 엉엉 우는 소리. 그렇게 두 번의 수업 내내 아이는 울면서 시간을 견뎠다. 엄마 없는 빈자리가 아이에겐 아직 적응이 필요한 숙제인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오늘은 3개월간 다닌 발레 수업의 공개 수업 날이었다. 아윤이는 한 달 전부터 엄마가 언제 오냐며 노래를 불렀다. 연차를 내고 공연을 보러 간 오늘, 아이의 모습은 수화기 너머 엉엉 울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강의실로 들어가는 발걸음부터 수업 내내, 그리고 교실을 나올 때까지 아이의 어깨에는 의기양양함이 가득했다. 아윤이는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나를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우리 엄마야, 우리 엄마야!'


저녁을 먹으며 친정엄마에게 이 얘기를 하니 말씀하신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의 우주라고 하는 거야.'


그럴까. 내가 정말 이 작은 아이의 우주일까.

예전에도 부모는 아이의 우주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당연히 맞는 말이지하며 공감했지만, 내가 생각한 우주의 의미는 물리적인 '보호'의 차원에 가까웠다. 그런데 요즘 아윤이를 통해 느끼는 우주는 그것보다 훨씬 깊고 오묘한 느낌이다.


엄마가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아이.

엄마가 있으면 세상에 도전해 볼 용기를 얻는 아이.



이 정도면 우리의 애착은 꽤나 단단하게 잘 형성된 것이라 생각해도 되는 걸까. 나라는 우주 안에서 아이가 마음껏 헤엄치고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고도 귀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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