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보다 나를 더 챙기는 행복한 이기주의자
저는 하고 싶은 건 어떻게든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는 걸스카웃 대보장을 하고 싶어서 하교 후 담당 선생님께 찾아갔던 적이 있어요.
"선생님, 저 대보장 하고 싶어요. 시켜주세요!"
당시 담당 선생님께서 대보장을 선출하기 전 당당하게 자신이 하고 싶다고 찾아온 아이는 제가 처음이라고 기특해하셨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 덕분에 남자아이에게 밀려 반장은 못했지만, 우리 학교 걸스카웃을 리드하는 대보장이 되었지요.
중학교 때는 god에 푹 빠져 있었어요. 손호영이 진짜 천사인 줄 알던 순수했던 그 시절, 내 방 벽은 모두 god오빠들 포스터로 도배되어 있었고, 학교 앞 문구점 문지방이 닳을 만큼 들낙거렸어요. 오빠들 사진이며 포스터며 각종 굿즈들을 수시로 사들여야 했으니까요.
오빠들이 부산에 내려올 때면 사직체육관 앞에 전날부터 길거리에 줄 서서 밤을 새웠어요. 당연히 서울도 갔었죠. 부산에서 출발하는 대절버스를 타고, 하늘색 우비를 입고, 하늘색 풍선을 흔들며 콘서트장에서 너무 좋아서 펑펑 울며 "god"를 외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생기면 선물과 편지를 싸들고 무조건 들이댔어요.
"선생님, 좋아해요. 사랑해요."
교무실이 그렇게 좋았던 그때를 생각해보면 내가 참 특별했구나 싶어요.
좋은 대학에 가고 싶었던 저는 고등학교 때는 닥치고 모범생으로 살았어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 1순위가 고등학교 때였던 걸 생각해보면 그때는 별 재미가 없었나 봐요.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고삐가 풀렸어요. 매일 노래방, 당구장, 술집과 엠티.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고딩시절 이후 맞이한 자유는 내 인생에서 최고로 막살았던 때에요. 가장 많이 마셨고, 가장 많이 놀았고, 가장 많은 친구들을 만났죠. 학점은 바닥을 쳤지만 전과도 했고 연애도 했기에 후회는 없어요.
대학생활이 시시해질 때쯤, 어학연수를 가고 싶었어요.
삼 남매에 장녀로서 집안 형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아버지에게 최대한 합의 가능한 선을 제시하며 외국으로 보내달라 했었어요. 동생은 삼수 중이었고, 막내는 중학생이었던 그때, 가족의 상황보다 나의 원함이 더 중요했던 저는 부모님을 졸라 뉴질랜드로 떠났어요.
어학연수에서 돌아와서는 바로 취업준비를 했어요. 3학년 2학기까지 열심히 자격증을 따고 자소서를 썼는데, 4학년이 된 3월, 좋아하던 오빠에게 받은 질문 하나
수경이는 꿈이 뭐야?
하고 싶은 걸 다 하며 살아온 것 같은데, 꿈이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어요. 충격에 빠져서 그때부터 꿈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래, 난 영어교사가 되고 싶었어!" 갑자기 4학년 때 영어영문과 부전공을 결정했죠. 동기들은 다 하나씩 취업이 되던 그때, 저는 새로운 전공의 대학원을 준비하며 4학년 2학기까지 빡빡하게 수업을 들었어요. 내가 한 선택이었기에 후회도 미련도 없었어요.
집에선 대학원을 보내줄 형편이 안되었기에 반대를 했지만,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보겠다 우겨서 국립대 교육대학원에 입학했어요. 매 학기 ALL A+로 장학금을 받았고, 전공 공부는 정말 재미있었어요.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는 건 이런 거구나.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는 거구나." 그때 처음 느꼈어요.
전공 공부가 재밌었기에 임용고시도 금방 패스해서 순조롭게 영어교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만했죠. 대한민국 고시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더라고요. 올인한 시험에서 최종 낙방하고 다음 해 3월, 취업과 동시에 임신을 했어요. 오 마이 갓! 이게 무슨 반전 전개?!
임신 이후로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가 없었어요. '아기에게 좋지 않으니' 좋아하던 빵도 맘껏 먹지 못했고, '모유 수유하니까' 커피도 라면도 줄여야 했지요. 지방 시골지역에서 직장생활을 했던 남편을 따라가 타지에서 혼자 독박 육아를 해야 했고, 내 모든 생활과 선택은 아이에게로 맞춰지기 시작했어요. '내가 뭘 원하지?'보다 '아이에게 뭐가 더 좋을까?'를 먼저 물었고, 내가 뭘 먹고 싶은지보다 남편에게 '오늘 뭐 먹고 싶어?'를 물었어요. 일을 하고 싶던 나였지만,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서 '일하는 나' 대신 '엄마인 나'를 선택했어요. 그때 당시에 워킹맘은 아이에게 충분한 사랑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요. (물론 지금은 엄마가 자기만의 일을 해야 애도 잘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요^^)
대부분의 엄마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나를 잃어버렸다'라고 느끼는 이유는 내 삶에서 내리는 대부분의 선택들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서 그런 것 아닐까요? B(birth_탄생)과 D(death_죽음)사이는 C(choice_선택)이라는 말도 있지 않잖아요.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내가 과거에 한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결정한다는데... 모든 선택의 기준이 '나'가 아닌 '아이 혹은 남편'이었으니 '내가 없어졌다'는 느낌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저 자신을 찾고 싶어서 제가 가장 먼저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나를 위한 선택을 하자'라고 마음먹는 것이었요. 아이를 위해, 남편을 위해, 시댁을 위해 '해야 하는 것'이 아닌 엄마인 내가 '나를 위해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자고 다짐했어요. 저녁 메뉴도 내가 먹고 싶은 걸로 하고, 나들이 장소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정하기로요. 해보니까 큰 일 안 나더라고요? 오히려 함께 즐길 수 있어 너무 좋더라고요!
내가 나를 위해 한 선택에는 좋은 에너지가 흐른다고 믿어요. 가족들에게도 그 에너지가 전해지면 같이 행복해지고요. 나를 위해 선택했기에 애들이나 남편에게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한테 어쩜 이럴 수 있어"라는 말이 나오지 않겠죠. 사랑이 아닌 희생은 반드시 부작용을 일으키니까요.
이 세상 누구보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나'라는 걸 아이를 키우며 자기 주도성을 잃어보며 깨달았습니다. 내가 뭘 잘해서가 아니라, 잘나서가 아니라, 그냥 나는 최고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요. 내 아이만큼이나. 그러니 저는 앞으로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를 위한 선택'을 할 거예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나를 가로막는 일, 계속 내 역할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일들은 나 자신이 선택한 겁니다. 모두 내 선택이에요. 모두 나의 몫입니다. 지금의 나는 인생에서 내가 했던 선택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인생의 태도> 웨인 다이어
고집스럽게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던 내가 엄마가 된 후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가장 먼저 결심한 것은 '나를 위해 배우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육아서를 대신 나를 잘 키우기 위해 인문서를 읽고, 아이를 부자로 만들기 위해 공부하는 대신 내가 부의 주인이 되기 위해 돈을 공부했어요. 아이를 앉혀두고 한글을 가르치는 대신, 내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시간을 더 많이 가졌습니다. 희생이 아닌 사랑만 선택하는 육아가 가능하다는 것, 엄마도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육아할 수 있다는 것을 제 삶을 통해 연구하고 실험하면서 저는 오늘도 성장하고 있어요.
아이를 위해 포기하고 희생했던 때보다 지금의 내 삶이 훨씬 좋아요. 남들이 보기엔 "너무 이기적인 거 아냐?"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불행한 희생주의자보다 행복한 이기주의자가 더 좋은 엄마라는 걸 확신하기에 오늘도 저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뭔지 나에게 묻고 가슴이 시키는 선택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