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씨 May 28. 2023

섬김

쩨다카 - 돼지치기 유세프





입덧이 시작되었다. 40도가 넘는 이집트의 여름, 나는 아직 어린 첫째를 어르고 달래 가며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구역질을 한다. 엄마가 구워주는 삼겹살에 김치 척 올려 상추쌈을 싸서 크게 한 입 먹어보면 소원이 없겠는데. 중동에서 돼지는 불결한 동물이라 먹지 않는다. 블록마다 고깃집이 있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중동은 삼겹살을 파는데가 없다. 예멘에서는 구경도 못해본 돼지를 그래도 여기 이집트에서는 딱 한군데서 살 수 있다. 길이 험하고 멀어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야 한다. 아기를 카시트에 앉히며 말한다. 오늘은 거기서 꼭 삼겹살을 사서 상추쌈에 밥 한공기 뚝딱 먹을거야. 포장도 안된 구불구불한 도로를 30분째 달린다. 점점 입덧이 심해진다. 아기도 멀미가 나는지 앙앙 울어댄다. 아직도 10분은 더 가야하는데. 아기를 어른다. 아기야, 조금만 참아. 오늘은 고기먹자. 오늘은 고기 줄게.


  “Hi, Yusef, How are you? Do you have any fresh meat today?”(유세프 안녕, 오늘 신선한 고기 있어?)

  “Hi, Mrs. Park. We do have! How much meat do you need?”(오, 미쎄스 박. 물론 있어요! 얼마나 필요해요?)


쾌활한 유세프는 큰 도끼 칼로 큼지막한 고기 덩어리를 뚝 하고 자른다. 경쾌한 칼놀림이 재밌다. 나는 멍하게 유세프가 고기를 자르는 것을 본다. 유세프는 가만히 허락해준다. 나는 눈으로 보면서도 항상 믿을 수가 없다. 중동에서 삼겹살을 사다니.



이집트는 이슬람교와 콥틱교(기독교 분파중 하나)가 공존해 있다. 기독교는 이집트 인구 전체의 10프로 정도 된다고 한다. 나라에서 인정받는 종교인데, 그들의 삶은 인정받지 못한다.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집트 사회에서 기독교인은 배제되어 있다. 이집트 신분증은 종교 표기가 기본이다. 그 신분증 때문에 평범한 기독교인들은 공공기관에서 일하기가 어렵다. 장사를 하려고 가게를 얻기도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천하게 여겨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아무도 살지 않는 동네에 모여 산다. 몽테뉴는 '한 인간의 품위와 가치는 그 마음과 의지로 이루어지는데, 그 용감성은 팔이나 다리가 아니고, 마음과 심령의 견고성'이라고 말했다. 이집트의 콥틱교도들은 사회의 경멸을 옷입고 마음과 의지로 굳건히 신앙을 지키며 산다. 



유세프가 자기 마을에 구경 한 번 가봤냐고 묻는다. 나는 아직 가보지 않아서 '아니' 라고 대답했다. 유세프는 내게 한 번씩 이 질문을 한다. 구경이라니.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다. 유세프는 쓰레기마을에 산다. 이집트는 재활용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냥 한데 넣고 버리면 된다. 그렇게 수거해서 쓰레기 마을에 갖다둔다. 유세프와 같은 이집트 기독교인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재활용을 분리한다. 이런 신기한 광경을 놓치고 싶지 않아 투어 상품에 쓰레기마을이 구성되어 있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나도 주변에서 한 번은 가볼만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우월감. 어려운 상황의 사람들을 보며 나의 환경에 감사하는 그 무섭고도 비뚤어진 감정이 들까봐 이제까지 가지 못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사는 유세프가 자기 마을을 구경가봤냐고 큰 목소리로 물어보는 거다. 마치 피라미드 구경가봤냐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씩 웃는 내 마음이 아프다.








마을에 들어가는 초입부터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제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이 쓰레기 더미 위에서 놀고 있다. 손가락이 까맣다. 일상에 널린 것이 쓰레기니 그것이 더럽다는 개념도 없다. 35도가 넘는 무더위에 그늘 하나 찾기도 어렵다. 뜨거운 태양 아래 고약한 냄새 속에서 어린 아기부터 나이 든 노인에 이르기까지 집 앞에 쌓아두다 못해 흘러내리는 쓰레기들을 분류한다. 마을을 지나가는 내내 소리없는 눈물이 흐른다. 온몸에 쓰레기 냄새가 나는 아이들은 학교에 갈 수도 없다.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은 더욱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기가 어렵고, 돌고 돌아 다시 이 곳에 와서 산다. 악순환이다. 마을 길목마다 불평등이 나를 환영한다. 나의 편협하고 한정된 시야로 공평함과 정의를 논하기를 어렵겠지만, 모두가 평등한 시대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길 하나 차이로 쓰레기를 분류하며 살아야 하는 세상과 쓰레기를 마음껏 버리는 세상이 있다는 것이 쉬이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나는 미안하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활짝 웃으며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어떤 이유에서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이들은 이집트에서 태어나서 미안하다. 자동차의 창문을 꼭꼭 닫아도 스며드는 쓰레기 냄새로 욱욱 입덧을 해서 미안하다. 물티슈로 손을 닦고 아기에게 간식을 주면서 쓰레기를 분류하던 손을 멈추고 우는 아기를 달래는 엄마에게 미안하다. 이 뜨거운 날,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차를 타고 있는 우리를 부러운 듯 쳐다보는 아이들의 순진한 눈망울을 보면서 미안하다. 우아한 우월감으로 아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내 마음에서 나는 냄새가 아이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보다 더 지독해서 미안하다.


유세프는 늘 내가 시키는 고기 양보다 넉넉하게 주었다. 나는 항상 괜찮다고 말했지만 유세프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마을 꼭대기로 올라가는 내내 나를 원망했다. 왜 괜찮다고만 말하고, 고깃값을 더 지불하지 않았을까. 왜 나는 이들의 삶을 그냥 바라만 보았을까. 나와는 인종도, 문화도, 언어도 다르니 마치 전혀 상관없다는 것처럼. 나는 왜 이런 환경을 눈으로 보고 나서야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그는 나보다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다. 청년들이 늘 우리집에 와서 밥을 먹고 교제를 나누는 것을 알고 그는 나를 칭찬했다. 블레이크가 '진정한 지식의 방법은 실험이듯이 앎의 진정한 능력은 경험하는 능력'이라 말한 것처럼, 그는 진정한 공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알았을까. 쓰레기 마을에 살면서 돼지를 치는 직업을 가졌는데 이방인으로 돈 벌러 온 우리를 귀하게 여겼다. 모든 사회적 편견과 신앙의 핍박을 견디면서 그는 항상 유쾌했다. 








쩨다카. 본뜻은 '의로움', '공의'인데 유대인들 사이에서 '자선', '기부'라는 말로 쓰인다. 유대인들은 구제가 공의의 차원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라고 믿는다. 그래서 공의의 뜻을 가진 쩨다카가 구제로 사용된 것이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구제할 의무가 있고, 또 필요한 사람은 부끄러움 없이 구제받을 권리가 있다. 구제 또한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탈무드는 나의 소유 중에 그의 것을 찾아보라고 가르친다. 즉, 내가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그의 것을 그에게 돌려준다는 뜻이다. 나의 소유를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다른 이의 것을 찾으며 구제를 하는 것이 곧 공의가 되는 쩨다카. 참 멋지지 않은가. 유세프는 내게 쩨다카를 베풀었다. 자신의 상황이 넉넉하지 않음에도 자신의 소유에서 나의 것을 찾았다. 그리고 나의 것만큼 내게 주었다.  



이집트에서 몇 개월에 한 번 손에 새로운 장난감이 생길까 말까 하던 아이는 한국에 오니 만나는 사람마다 장난감을 사주니 신이 난다. 아마 아이를 처음 보거나 오랜만에 보아서 반가운 마음을 아이가 좋아할 만한 물건을 사주며 표현하는 것이리라. 없던 자동차가 넘쳐나는데 아이는 하나를 가지고 놀다가 곧 싫증을 내고 다른 것을 가지고 논다. 손은 두 개인데 새 장난감을 더 잡고 싶어서 이미 손에 있던 자동차를 계속 떨어뜨린다. 자기의 필요보다 원함이 커진다. 원함이 커지니 다른 친구도, 아니 동생도 만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자기 거다. 스스로 지불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내 거라고 외친다. 아이와 함께 쩨다카를 연습한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 있어. 우리보다 이것을 더 필요한 사람이 가질 수 있도록 돌려주면 어떨까. 우리는 이미 너무 많으니까. 아이가 내 눈을 본다. 나는 빙그레 웃는다. 아이는 파란색 말고 노란색이랑 주황색은 줘도 된단다. 쓰레기 마을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살면서 돼지를 치는 유세프가 내게 보여준 넉넉함까지는 아닐지라도, 아이는 처음으로 자기의 것을 온전히 주장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경험을 했다. 넉넉하지 않으면 불공평한 이 사회에서 환경과 상관없이 내 것을 나누는 이 마음이 점점 커져나가길. 


 

  버리자.

  쥐고 있던 욕심을

  쫓아 가던 허영을

  갖고 있던 오만을

  손을 펴고 공중에 흩어버리자.

  버려야 비워지고 비워져야 채워지니.

  욕심을 비워 평안을 채우고

  허영을 비워 감사를 채우고

  오만을 비워 겸손을 채우자.  

  채우자.

  콥틱교도의 겸허함을

  유세프의 넉넉함을

  아이들의 천진함을

  채워야 흐르고 흘러야 계승되니.

  겸허함이 흘러 온유함으로

  넉넉함이 흘러 기쁨으로

  천진함이 흘러 순전함으로 계승하자.  



나를 비우고 채워서 흐르게 하고 계승시키는 과정. 나는 이것을 아이 양육이라 부른다. 나는 이것을 인간의 삶이라 부른다. 내게 주어진 삶을 가장 인간답게 살아내는 방법이라 부른다. 나는 오늘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존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