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잘 토브 - 호기심 많은 이브라힘
하늘이 높다. 쨍쨍한 햇빛에 눈이 부신다. 바람에서 열기가 느껴지면 새빨간 수박이 맛있다. 여름이 시작되는 신호다. 아기는 등에 땀이 난다. 엄마랑 붙어 있으면 아기들이 좋아한다는데 우리집은 예외다. 고요한 예배당에 아기 울음소리가 앙앙 울려퍼진다. 우는 아기를 달래며 뒤뜰로 나왔다. 갑갑해 하는 아기띠를 풀어주면 아기는 아장아장 마당을 걷는다. 아기는 곧장 모퉁이로 간다. 모퉁이를 돌면 이브라힘이 있을까. 아기는 나를 돌아보며 '아아' 소리를 친다. 이브라힘이다. 이브라힘은 올라가지 말라고 막아 놓은 난간 위를 최선을 다해 올라가려고 애를 쓰는 중이다. 아기를 보자마자 반가운 목소리로 하이 인사를 한다. 나는 이브라힘이 괜히 아기에게 말을 건네다가 난간에서 떨어질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이 든다. 급히 앞뒤를 둘러본다. 엄마가 어디 가셨을까. 아기는 이브라힘을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고 이브라힘은 화답하듯 난간넘기를 성공할 것 같다. 아. 저거 넘어가면 안되는데. 따라 올라가고 싶어하는 아기를 잡고 있는 나는 마음만 급하다. 넘어갈듯 아닐듯 이브라힘은 발 하나를 끈질기게 난간 위로 올린다. 아이의 발이 꼭대기에 닿는 순간, 저기서 누군가 후다닥 뛰어 올라 이브라힘을 허리에 꿰고 다시 뒤뜰에 내려놓았다. 이브라힘의 아빠다. 휴. 살았다.
다섯 살 이브라힘은 씩씩한 소년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만지고 싶은 것도 많아 손은 늘 새카맣고 티셔츠 앞 부분도 항상 검게 얼룩져있다. 아빠는 이브라힘을 한 쪽 구석에 데려간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아주 호되게 야단맞겠다 싶었다. 떨어지면 큰일 날만큼 난간이 높은 것은 아니다. 한 살인 우리 아기의 눈에는 백두산 같겠지만 다섯 살 이브라힘에게는 정복 가능할만한 높이다. 본능. 다섯 살 남자아이가 가진 고지(高地)를 정복하고 싶어 하는 본능을 본다. 정연보는 본능은 배우거나 연습이 없이 완벽한 행동을 만들어내고 본능 없이는 행동이 없으며 본능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으니 아이의 행동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그래도 올라가지 말라고 막아 놓은 곳이니 안가는 것이 좋겠지. 아빠가 장면을 목격하고 허리를 꿰찼으니 오늘은 혼나도 할 말이 없다. 아기를 데리고 조심조심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는다. 벤치에 걸터앉아 흘깃 이브라힘 쪽을 바라본다. 살짝 굴리던 내 눈이 떨어질듯 커졌다. 아빠와 이브라힘이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이브라힘은 우리쪽으로 발랄하게 뛰어온다. 타타타타. 경쾌한 발걸음 소리에 내 가슴이 놀란다. 이브라힘의 얼굴을 살폈다. 울지 않았다. 화가 나지도, 속상해하는 기색도 없다.
“Ibarahim, What happened? Is everything alright?” (이브라힘, 무슨 일이야? 다 괜찮아?)
이브라힘이 내 눈을 멀뚱멀뚱 쳐다본다. 아뿔싸. 이브라힘은 영어를 못하지. 이브라힘은 배가 고프다. 가방을 가리킨다. 나는 아기과자를 꺼내 이브라힘과 아기에게 하나씩 주었다. 아빠가 이 쪽으로 걸어온다. 매번 내가 간식을 주는 것이 미안한 모양이다. 과일을 가져왔다고 봉지를 준다. 잘익은 청포도가 맛있겠다. 잘먹겠다고 인사하며 넌지시 이브라힘 때문에 놀라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이브라힘이 마침내 성공을 하고야 말았다며 활짝 웃었다. 마침내라니. 이건 이브라힘이 그 난간에 발을 올라가길 기다린 사람이 쓸 법한 말이 아닌가. 아주 위험해 보이진 않는다 해도 아이에게 난간 위에 올라가는 것을 장려하면 안되는 일 아닌가. 나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섞인 얼굴을 보며 그가 말했다. 아들이 난간을 오른 것은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는 일이고, 이전에도 이 부분에 대해 언급했으니 아들이 실수한 것은 맞지만 아들이 자기 나이에는 시도하기 어려운 일을 끝내 해냈으니 그 도전에 대해서는 칭찬해야 한다고. 그래서 아들에게 난간의 위험에 대해서 한 번 더 알려주고, 실수했으나 끝까지 목표를 완수한 아들의 용감함을 이야기하며 하이파이프를 했다고 한다. 조던 피터슨이 '문제 해결을 소망하면서 매 순간 당신 앞에 나타나는 가능성을 놓치지 말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자신의 한계를 끝까지 시험하고 도전한 아들의 모습을 마땅히 응원해주는 아버지였다.
실수한 아이에게 되려 칭찬이라니. 그래서 이브라힘의 발걸음이 가벼웠구나. 이브라힘은 실수해도 되는 집에 살고 있구나. Mazel tov(마잘 토브). 이는 축하한다는 히브리어다. 유대인들은 아이가 실수를 하거나 실패할 때 아이에게 축하한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아이의 실수를 보고 '으이구, 잘한다' 처럼 비꼬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은 실수나 실패에서 반드시 배우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이의 새로운 깨달음에 대해 축하를 해준다. 예를 들어, 뜨거운 것을 만진 아이는 가스렌지 위에 올려진 냄비는 뜨겁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므로 아이의 새 지식에 대한 축하를 하는 것이다. 실수나 실패가 용납되는 가정에서 자라기에 유대인은 도전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 그래서 실제로 청년 창업 비율이 굉장히 높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면 되니 마음에 부담이 적다.
올해 둘째가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 첫째와 둘째는 성향이 사뭇 다르다. 첫째는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숙제를 기억하지 못한 적이 거의 없다. 물건을 쓰면 제자리에 가져다 둔다. 반면 둘째의 손에서는 번개 에너지가 나간다. 둘째가 손을 스치기만 해도 물건이 망가진다. 서재에서는 마우스가 고장나고 주방에서는 유리그릇 뚜껑이 부러진다. 이러니 입학 준비물부터 신경이 안쓰일 수가 없다. 아이는 제깐에 하나하나 챙긴다고 챙겼는데 집을 나서고 보면 꼭 무언가 두고 왔다. 참 희한한 일이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면 학교에 가져간 물통을 주방에 내어 놓는다. 설거지를 하려고 들어갔는데 둘째 물통이 안보인다. 이번만 해도 벌써 세 번째다.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한 번에 대답하는 법이 없다. 저번에 물통을 어디서 찾았더라 생각하다 학교 앞 놀이터 모래사장에 있었구나 생각이 든다. 아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커진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지, 대체 엄마가 얼마나 학교를 뱅뱅 돌아야 하는지 하고 싶은 말이 넘쳐나니 감정도 점점 짙어진다. 아이는 아직 나의 목소리를 못들었나보다. 폭발하기 직전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엄마 하고 뛰어와 나에게 안긴다. 그리고 자기가 오늘 학교에서 얼마나 선생님한테 칭찬을 받았는지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는데 하이파이브를 하던 이브라힘이 생각난다. 벌써 세 번째니, 그리고 사실 두 번째 잃어버렸을 때 으름장을 놓았으니 갑자기 잘했다고 칭찬해주기는 어렵다. 그래도 이번엔 실수해도 된다는 느낌을 주어야겠다. 우리집은 실수해도 되는 집이라는 느낌.
한참 자랑을 하다 끝낸 아이는 기분이 좋다. 아이는 숙제를 하기 시작한다. 주방에서 가방을 정리하다가 아무렇지 않은듯 아이에게 물었다.
“우빈아, 가방에 물통이 없네? 어디갔을까?”
흥얼흥얼대던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쑥 집어넣고 나를 본다. 자기도 아차 싶은데 대체 어디에 두었을까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어디갔지? 저번에는 물통이 놀이터에 놀러갔고, 그 전에는 물통이 체육관에 놀러갔는데 이번에는 어디로 놀러갔을까?”
놀러갔다는 말에 아이는 신이 났다. 그래서 어디 놀러갔을거 같다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럼 놀러간 물통 내일 집에 데려오자고 했다. 잠은 집에서 자야한다고 했다. 아이는 결연한듯 네 엄마 하고 외친다. 무언가 의무를 가진 사람처럼.
물통은 첫째가 찾아왔다. 도서관에 있었단다. 둘째는 자기도 찾아보았는데 없어서 어쩌지 했는데 형이 가져왔다며 물통이 집에 돌아왔음을 기뻐했다. 다음에는 자기가 꼭 집에 데려올거란다. 아니 처음부터 잊지말고 집에 함께 오면 더 좋지 않겠니 하고 웃으니 오 생각해보니 그렇다며 함께 오겠단다.
어른인 나도 실수가 많다. 말 실수, 행동이 빠르거나 혹은 느려서, 손이 야물지 못해서 실수를 한다. 그런데 아이는 당연히 실수가 많겠지. 나는 아이에게 어른의 모습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왜 실수하고 실패하면 안되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아이의 실패에 내 자존감을 얹은 것은 아닐까. 자존심을 세우려는 나의 오만한 마음이 실수하면 안되는 완벽한 아이를 바란 것은 아닐까. 이브라힘의 가정처럼 나도 아이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마잘 토브. 잘했어. 축하해. 우리, 더 많이 배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