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서는 기다렸던 것이 어딘가에서는 반갑지 않은
예멘에서 나는 매일 8시간을 단 한 마디도 입을 떼지 않고 살았다.
출근하는 남편에게 인사를 건네고 남편이 집에 돌아올 때까지 집은 고요했다.
우리는 신혼이었고, 아이가 없었다.
전기가 하루에 서너시간 들어와서 인터넷 접속도 쉽지 않았다.
나는 세상과 단절되었고, 사람들과도 단절되었고, 언어와도 단절되었다.
나는 주고 거실에 있는 큰 유리창 앞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우리집은 3층이었다.
집 앞에는 쓰레기장인지 잔디밭인지 알 수 없는 공터가 있었다.
매일 아침 소년이 양을 몇 마리 끌고 따가운 햇빛에 색이 바래진 풀을 먹였다.
거실에 앉으면 맞은 편 빌라의 옥상이 보인다.
가끔 4층에 사는 부인이 아이들 학교를 보내고 나면 찻잔을 들고 옥상에 올라온다.
까만 아바야를 입고, 까만 히잡을 쓰고, 까만 니깝으로 얼굴을 가리고, 까만 장갑을 끼고서.
옥상에는 파라솔이 있었다.
바깥 세상을 구경하지 못하는 부인을 위해 아마 남편이 설치해주었겠지.
부인은 그렇게 옥상에 올라와 차를 마시고 사람을 구경하고 햇빛을 쬐고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한 번도 그 부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차를 마실 때 부인은 니깝을 살짝 들어 올리고 찻잔을 입에 가져다가 마신 후 곧 니깝을 내렸다.
마치 요즘 우리 아이들이 마스크를 쓰고 물을 마실 때 잠시 내리고 곧바로 마스크를 다시 쓰듯이.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나는 예멘에서 살았던 3년 여 동안 부인에게 여러 감정을 느꼈다.
나도 그도 밖에 나가지 못해 세상과 단절되어 사는 사람에 대한 연민, 나는 외국인이어서 그래도 자유가 조금은 있는데 그는 평생을 저렇게 살아가야 하는구나 싶은 긍휼함,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했던 일주일 두 세 번, 부인이 옥상에 올라오지 않으면 나는 그를 걱정했다.
코로나가 오고 언택트 시대가 시작되면서 온라인 수업이 성행했다. 아니, 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수업도 학원 수업도 세상의 모든 수업이 온라인화 되어 가고 있었다.
그 때 생긴 신조어가 있다.
돌밥. '돌아서니 밥할 시간'이라는 뜻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다 보니 엄마들이 아침 챙겨주고 돌아서서 점심 준비하고 돌아서니 저녁 시간이라는 밥한다는 이야기를 만나기만 하면 하소연하듯 웃프게 했다.
예멘에서 돌밥은 나의 삶이었다.
아침을 먹고 출근하는 남편은 점심 식사를 하러 집으로 왔다.
함께 점심을 먹고 다시 남편이 출근을 하면, 나는 설거지를 하고 정리한 이후에 저녁 찬거리를 준비한다.
그리고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오면 저녁을 먹었다.
그 때 나는 매일 남편이 집에 점심을 먹으러 오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혹시 외근이라도 갈까봐, 혹시 회사에서 점심 약속이 생길까봐 출근하면 11시를 기다렸다.
11시쯤엔 남편이 전화가 온다.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 확인과 점심 일정을 알려주기 위해.
남편이 아닌 그 누구와도 만나기 어렵고, 대화하기 어려운 세상에서는 돌밥이 감사하다.
자유로운 누군가에게는 돌밥이 결핍이 될 수도 있지만 자유롭지 못한 누군가에는 돌밥이 감사가 될 수도 있다. 참 희한한 일이다.
귀국하고 코로나를 맞이했다. 내게도 돌밥의 삶이 시작되었다.
사람은 역시나 이기적인 존재여서 마음 깊에 새겨야 할 훌륭한 기억들, 곧 나의 이기심을 거슬러야 하는 기억들은 잘 잊어버린다.
돌밥이 반갑지 않았다.
아이 둘과 종일 씨름하며 밥을 해내야 하는 것에 대해 여자의 삶을 이야기하고, 나의 마땅한 자유를 침범하는 것에 대해 울분을 토하고, 사회구조적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거기엔 감사가 없었다.
예멘에서의 삶에서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기억들은 나의 이기심에 파묻혀 찾아볼 수 없었다.
코로나가 없었던 시절에도 코로나 시대처럼 살았던 예멘이 기억난 어느 날,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울었다.
이빨과 입술 사이에서 눈물 섞인 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옥상에 올라와 세상을 마주하던 4층 부인이 생각났다.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자유라고 말하는 것을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