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엄마, 이번에 U-20 월드컵에서 우리가 4강까지 갔는데, 이탈리아한테 결국 졌잖아. 그래서 이스라엘이랑 3,4위전 했는데 그것도 져서 너무 아쉬웠어. 그치?"
"응, 맞아. 이스라엘이랑 할 때는 이길 줄 알았는데, 졌네 아쉽게."
"엄마, 거기에 손흥민이랑 이강인 있었으면 우리가 이겼겠지?"
"손흥민이랑 이강인은 20살 넘어서 못나가긴 하겠지만, 나갈 수 있었으면 우리가 이겼을 수도 있겠지?"
"아. 아깝다. 손흥민이랑 이강인 나갔으면 우리가 우승인데. 아쉽다. 그치?"
매일 우리 모자의 대화의 흐름은 이렇다.
우리집에는 음바페와 메시가 산다. 재빠르고 민첩한 첫째는 음바페를 좋아한다.
첫째는 양발잡이이긴 하지만, 주로 슛팅은 왼발을 사용한다.
왼발을 쓰니 메시를 좋아해야할 것 같지만 빠른 몸놀림의 음바페가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반면 둘째는 피지컬이 좋다. 두 살 차이가 나는 둘째가 수비를 하면 분명 첫째의 키가 더 큰데도 밀리지 않는 느낌이 든다.
둘째는 어떤 자리든 최선을 다한다. 공격도 수비도 키퍼도 에너지가 넘친다.
그래서인지 둘째는 어느 자리에서나 만능인 메시를 좋아한다.
복층인 우리집엔 다락방이 있다. 다락방의 천정도 꽤 높아서 왠만한 성인 여자의 키는 닿지 않는다.
처음에 이사를 왔을 때 그 위에서 빔을 켜고 영화를 보는 상상을 하며 스크린을 대신할 한쪽 벽면을 둘러싸고 소파와 좌식매트를 놓아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물론 거기서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 아늑함은 이제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예쁘게 놓아둔 가구들은 어느 한 쪽으로 밀어두고 이제 다락방은 축구장으로의 기능을 하고 있다.
하교 후 집에 돌아와 손을 씻고, 간식을 먹고, 숙제를 하는 시간이 지나면 둘은 어김없이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그러곤 곧 세기의 경기가 펼쳐진다. 메시 VS 음바페, 음바페 VS 메시.
심지어 우리집 세계지도에 붙어 있는 자석국기를 가져간다.
메시는 아르헨티나니까 아르헨티나 국기를, 음바페는 프랑스니까 프랑스 국기를 가져가서 경기 전에 엄숙하게 서로에게 자석국기를 들고 한 번씩 보여준다.
경기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볼을 찰 땐, 중계까지 한다.
"네, 이번엔 아르헨티나가 치고 나가는데요~"
이렇게 말이다.
얼마나 진지한지 누구 하나라도 지고 나면 엉엉 울기도 하고, 억울하다며 씩씩 거리기도 하고, 규칙을 잘 지키라고 서로 빽빽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여기가 바로 카타르 월드컵 경기장이다.
열 살 아들의 꿈은 축구선수다.
여덟살인 둘째는 아직 되고 싶은 것이 여러 가지이고, 그 중의 하나가 축구선수지만 첫째는 다르다.
첫째는 어떤 선수가 되고 싶은지, 어떤 리그에서 뛰고 싶은지, 자기의 기량은 어떤지, 어떤 포지션이 제게 잘 맞는지 마음에 새겨져 있다.
꿈을 적어보라는 학교 숙제에도, 취미를 적는 시간에도, 무엇을 잘하냐고 물어보아도 오직 축구다.
책도 축구 만화책, 만화를 보아도 축구 만화, 노래를 들어도 축구 응원가를 듣는 아이.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20년 전인 2002년까지 월드컵 선수들의 이력을 꿰는 아이.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이 잘하는 것에 대한 몰입도가 굉장히 높은 아이.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이가 내게로 와서 말했다.
"엄마, 축구 하고 싶어요."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한다. 놀란 마음이 표정이 될까 두려워 싱크대 쪽으로 몸을 돌리고 흐르는 물에 채소를 씻는다.
아이가 가만히 서 있다.
나는 표정관리를 하고 다시 뒤를 돌아 아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아빠 퇴근하시면 아빠랑 이야기 해볼까?"
아이는 신이 나서 '네' 하고 동생에게로 뛰어간다.
대안학교를 보내는 엄마라고 말하면서, 아이의 꿈을 지지한다고 이야기하면서 나는 결국 아이가 꿈을 이야기할 땐 가슴이 철렁했다.
이미 학교를 보내는데 학비가 드는데 축구를 하면 그 비용도 만만찮을 텐데 어떻게 해야하나 싶은 현실적인 생각이 첫 번째였다.
축구를 시작하면 대안학교를 보내지 않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두 번째였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축구를 그만두게 되면 아이는 어떤 학교를 가는 것일까 생각이 세 번째.
그 짧은 시간에 채소를 씻으면서 나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생각은 걱정이 되었다.
남편이 돌아오고, 저녁을 먹으면서 나는 아까 첫째가 말한 축구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우리집은 왠만하면 남편과 내가 둘이서 먼저 이야기를 주고 받은 후, 의견이 일치할 때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오늘은 그냥 남편 생각이 궁금하기도 하고, 남편 생각대로 따라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아이들과 저녁 먹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편은 얘기를 듣더니 아이에게 말한다.
"오, 너무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아빠가 예전에 어렸을 때 FC 다녀봤거든. 그 때가 딱 열 살이었거든. 그런데 지금 우리 한빈이 우빈이가 하는 것처럼 축구할 기회가 거의 없었어."
"왜요?"
"음, 형아들이 일단 너무 많았고, 아빠는 어려서 뛸 기회가 많이 주어지진 않았어. 그래서 지금 너희들처럼 기술을 연습하기가 어려웠어."
"그럼 어떻게 해요?"
"아빠 생각에는, 가고 싶으면 고학년이 되어서 가면 더 좋을 것 같아. 저학년보다는 기회가 많은 게 사실이거든. 그 전까지는 아빠랑 충분히 연습하면 어떨까?"
"네! 좋아요!"
남편은 지혜롭게 아이와 이야기했다. 아이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주고 공감해주며 경험에서 나온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주었다. 아이는 어떠한 상한 마음이 없이 아빠의 의견을 따랐다.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되었냐고.
고학년 때까지 축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한다고 남편이 대답했다.
5학년 정도부터는 아이들이 축구를 하는 아이, 하지 않는 아이가 분명해진다고.
축구를 하는 아이 중에서도 잘하는 아이, 잘하는 아이 중에서도 어떤 포지션을 잘하는 아이가 정해진다고 했다.
그 정도까진 축구에 대한 열의가 있어야 그 때 축구를 진짜 배울 것인지 이야기해 볼 수 있는 거라고.
FC 생활이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에 지금 재밌다고 해서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아. 그런 거구나.
"그럼, 한빈이가 축구를 해도 괜찮아?"
"왜 안괜찮아?"
"아니, 학교 학비도 들고 FC도 가야 하고 그러면."
남편이 나를 보며 웃었다.
"그 때 가서 생각해보자. 카타르 월드컵부터 시작된 축구 열풍이야. 아직 6개월 밖에 안되었어. 내가 말한 건 2년 뒤잖아. 그 때 가서 생각해보면 돼."
그렇다. 2년 뒤의 일을 미리 당겨와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꿈을 지지하는 엄마가 아니라고 힘들어할 이유도 없다.
그 때, 그 일이 일어나게 될 때, 최선을 다해 반응하면 되는 거다.
오늘 아이는 평안하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나도 평안하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