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쉬 - 목동 무함마드
좁은 골목길. 아이는 작은 손에 막대기를 들고 길을 나선다. 떠나기 전, 아이는 양의 목을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춘다. 이젠 길을 떠날 시간이야. 털이 복슬복슬한 양들 옆에서 아이는 막대기로 그들을 몰고 간다. 아이를 따라가던 양이 살짝 다른 방향으로 몸을 튼다. 아이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잡고 있던 양의 고삐를 재빨리 제 쪽으로 잡아 끈다. 제멋대로 고집이 센 양을 다루는 것은 늘 아이의 몫이다. 희한하게도 양은 아이의 음성을 듣고 아이가 인도하는 대로 목초지를 찾아 떠난다. 아이는 양의 눈을 가만히 바라본다. 오로지 아이만 바라보는 그 천진한 눈. 아이도 그 눈을 닮았다. 이윽고 목초지에 도착한다. 파란 하늘,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고 푸르른 풀밭에 양떼들이 무리를 지어 풀을 뜯는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아이를 발견한 남편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며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Muhammad!“ (무함마드!)
아이가 뒤를 돌아본다. 남편에게 웃으며 답을 한다.
“Hey, Shams!” (헤이, 샴스!)
아이가 점점 다가온다. 몇 년만에 돌아온 튀니지에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인사하는 열 살 아이, 무함마드. 양을 몰던 그가 고개를 든다. 아이는 다운증후군이었다.
양과 낙타를 사랑하고 북치는 것을 즐기는 다운증후군 목동. 태어나자마자 가족들은 무함마드가 어떤 상태인지 알았다. 중동에서는 아들이 태어나면 주로 할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준다.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무함마드라는 이름을 주었다. 무함마드는 본래 이슬람교 창시자의 이름이다. 그래서 중동에는 이 이름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자기의 아무 자녀에게나 이것을 주진 않는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가장 약하고 볼품 없어 보이는 아이에게 가장 강하다고 여기는 선지자의 이름을 주었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말한 존재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대는 전체를 완성하는 일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특별한 존재이기도 하다.
- 발타자르 그라시안 '나를 아는 지혜' 중에서
아이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 할아버지의 마음.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이름을 주었고, 그 이름은 곧 아이의 존재가 되었다. 세계의 주민은 개인이라고 말한 소로우처럼 아이는 세계가 되었다. 참 멋진 할아버지다.
무함마드는 지금도 할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손자다. 그래서 그런지 나를 처음 본 무함마드는 스스럼이 없다. 지방에 살아 외국인 구경은 거의 못했을텐데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답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편안하게 한다. 질문도 거침없다. 물론 말투는 조금 어눌하고 발음은 알아듣기 어렵다. 그래도 개의치 않는다. Shams(샴스. 남편의 아랍 이름)랑 결혼했냐, 아기는 언제 나오냐, 샴스랑 튀니지에서 살 거냐. 나는 샴스랑 결혼했냐는 질문에만 정확하게 '응' 이라고 대답했다. 나머지는 전부 인샬라니까.
무함마드는 약간 더듬는 것 말고는 일반 아이들처럼 말한다. 어쩜 이렇게 말을 잘하지. 내가 다운증후군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무함마드가 특별한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는 내가 미디어가 아닌 직접적으로 만난 첫 다운증후군 아이다. 다만 내가 본 것은 무함마드를 둘러싼 주위 사람들의 아이를 향한 태도가 굉장히 인격적이었다는 거다. 인격(人格). 인격은 사람의 격이다. 사람에게 어울리는 자격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 자격이 대단하건 대단하지 않건 사람에게는 이미 스며든 격이 있다. 그 스며듦으로 우리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무함마드의 가족들은 무함마드를 격이 있는 사람으로 존중하며 대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뤼디거 달케가 말한 이성과 공동체 의식을 지닌 존재로서의 품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무함마드는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여러 번 말하곤 했다. 그러나 아이의 말이 끝날 때까지 그 누구도 끼어드는 법이 없다. 무함마드의 가족들, 친구들 모두 아이의 말을 경청했다. 잘 못알아들었으면 무함마드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물어보았다. 그가 질문을 하면 친절하게 대답하고, 그가 유머러스한 농담을 이야기하면 함께 웃었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내뱉는 짧은 단어들에 의미를 두며 온 마음을 다해 경청했다. 진심으로 들어주고 다른 사람에게 온전하게 집중하는 것은 언제나 사랑의 표현이다. 무함마드는 오롯이 사랑을 받고 있었다.
유대인 교육에 'Mensch(멘쉬)' 라는 말이 있다. 유대인 부모는 아이를 멘쉬가 될 수 있도록 기른다. 멘쉬는 신과 사람을 사랑하고 훌륭한 인성으로 주변에서 신뢰를 받으며, 선한 영향력을 흘려 보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유대인은 자녀의 경제 교육에도 열성이 대단하지만 자녀가 부자가 되기보단 청부(淸富)가 되기를 가르치고 청부이면서도 멘쉬의 경지까지 가기를 원한다. 자녀가 되기를 바라는 모습이 멘쉬라니. 이 얼마나 멋지고 신선한 일인가. 다운증후군인 무함마드는 멘쉬 정신이 깃든 가족에게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일반 지능을 가진 사람도 고집불통인 양을 치는데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무함마드의 가족들이 그에게 양 치는 법을 가르치려면 그보다 수 배의 노력을 들여야 했을 테다. 가족들은 멘쉬 정신으로 그 일을 해냈다.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 부모가 준 안정감, 형제들의 돌봄 속에서 그는 한 인격체로 올곧게 성장했다. 그래서 매일 좁은 골목길을 통과하며 양떼를 몰고 막대기 하나만 들고 푸른 풀밭을 찾아 나선다. 형이랑 같이 가던 길을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 다닌다. 가족들은 그를 믿는다. 양들은 무함마드의 목소리에 길들여진다. 집 안에 갇혀있을 법한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와 자연과 동물과 소통하며 홀로 목적지를 찾아 떠난다.
무함마드는 내가 웃으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마주 보며 미소짓다가 나를 보는 아이의 시선에 덜컥 마음 한 켠이 불편하다. 아이라면 누구나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빤히 쳐다볼 수 있는데 왜 나는 갑자기 부담스러운 생각이 드는 것일까. 불편함을 애써 감추고 어색한 얼굴로 아이를 대하며 깨달았다. 나는 사람을 일반인과 장애인의 범주로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한데 어우러진 적이 없으니 무함마드와 함께 있는 시간이 나에게는 참 생소하구나. 생소하니 낯설고, 낯서니까 불편하다. 귀국하고 7년 동안 나는 아직도 무함마드처럼 키워진 다운증후군 아이를 만나지는 못했다. 어디엔가는 있으리라. 예전에 기사에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쩌면 그것이 사실이라 내가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의 세계가 그만큼 편협한 것일지도. 그것도 아니면 아직 한국 사회는 범주 구분이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무함마드를 사람보다 장애인으로 여겨 느낀 불편함은 이 곳에 와서 또다른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여전히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 있다. 그 단층이 너무 정밀해서 두 범주로 세상이 참 잘돌아간다. 거기엔 명확한 기준도 정확한 범위도 없다. 요즘처럼 심리 관련 병명이 많아지는 세상에선 더욱 범주의 경계는 모호하다.
멘쉬가 되자. 나부터, 우리부터 멘쉬로 인간을 범주로 나누지 말고 한 인격체로 대하자. 관념과 편견없이, 인종과 문화없이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자. 거창할 것 없다. 나부터 아이를 수학시험 결과로 대하지 않겠다. 아이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이유를 들어보고 대화하겠다. 아이의 꿈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처럼 정규 과정에만 국한시키지 않겠다. 아이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이룩하기 위한 방법만 가르치지 말고 정신적 풍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자. 사람을 사랑하고 무례하지 않고 옳은 일을 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멘쉬가 넘쳐나는 세상,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이렇다면 얼마나 멋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