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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달 Nov 03. 2020

자식한테 준 거 없는 부모일수록 더 달라고 난리

“나는 요구할 수 있고, 너는 거절할 수 있어” 성숙한 인간관계


2020/11/3/화


자기돌아봄, 자기인식력의 중요성

 

아이러니하게도 자식한테 해준 거 없는 부모일수록 자식 멱살을 잡고 ‘더 내놓으라’ 고  giral 이다. (giral 말고 더 정확한 대체어를 아직 찾지 못한 점 양해 바람)  다른 집 자식들은 용돈을 얼마를 주더라, 누구는 계절마다 해외여행을 보내주더라, 근사한 데 데려가 외식도 많이 시켜주더라, 차도 알아서 바꿔주더라’ 아주 끝도 없다. 남에게 받을 것만 따질 뿐, 정작 자신이 남에게는 ‘단 한 줌의 무엇’도 주지 않았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 파렴치. 반면 자식에게 말 한마디도 조심 조심하며 귀하고 귀하고 대하면서 키운 부모, 자식에게 물심양면으로 다 퍼주고 애쓴 부모일 수록 고개숙인 벼처럼 겸손하다. 그들은 부끄러운 듯 자식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나즈막이 속삭인다. 더 챙겨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내가 너한테 해준 거 없는데 이렇게 잘 커줘서 고맙다고. 우리 식구 건강하게 이렇게 모여 밥 한끼 먹으니 기쁘고 감사하다고 미소 짓는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부모의 모습은, 아이를 키우는 우리에게도 나타난다. 애한테 해준 거 하나 없는 엄마들이 더 난리다. “왜 우리애는 영어책을 안 읽죠? 영어책 읽으라고 하면 온 몸을 비비 꼬면서 하기싫은 내색을 하는데 꼴보기 싫어 죽겠어요.”이런 말 하는 엄마 치고 잠자리에서 꾸준히 아이에게 영어그림책 읽어준 엄마 못 봤다. 밤마다 피곤한 눈 비비며 아이에게 책 읽어주는 노동을 기꺼이 한 엄마는, 그림책이 주는 위로와 감동을 아이와 나누면서 나즉이 속삭인다. “아. 좋다. 이것으로 족하다. 참 고맙고 행복하다” ‘아니 도대체 몇일을 읽어줘야 읽기독립을 하는거야? 힘들어 죽겠네!!” 하지 않는다. 힘들어 죽겠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그 일을 정말이지, 제대로 힘들게 해낸 사람 못 봤다. 힘을 들여 정성을 들여 제대로 해본 사람들은 다르다. 힘껏 실천하는 그 ‘과정’속에서 그  ‘순간순간’에 이미 감사와 기쁨을 한껏 누리기 때문에 불만은 없고 감사만 가득하다. 이것으로 족하다. 여한이 없다. 한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목적이 ‘애 읽기독립 앞당겨서 책 읽어주는 노동에서 벗어나고자” 함이라면 그 책읽기는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고통이다. 아예 안 읽어주고 안 구박하는 편이 낫다. 어설프고 간헐적인 시도는 자신을 속인다. ‘내가 너한테 읽어준 책이 몇권인데!!! (실은 꼽아보면 몇 권 안됨) 나한테 니가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알파벳도 몰라????? 나한테 너 이럴 수 있어??” giral 도 가지가지다.


자기 돌아봄이 되는 엄마는 자기 돌아봄으로 재빨리 ‘알아’ 차린다. “아, 나 애한테 영어그림책 읽어 준 지 고작 4개월 밖에 안 되었지? 읽어준 책도 헤아려 보니 그리 많지 않았구나.. 4개월 만에, 이 적은 양의 책을 읽고 여섯살 애기가 영어책을 읽기를 바라고 있었던 거니? 넌 10년 영어해도 영어원서 못 읽잖아. 정신차리자 나야.” 할 지력이 있다. 이렇게 보면 “지력은 곧 사랑이다” 이라 말씀하신 천재시인 이상의 연인이자 한국의 피카소 김환기 화백의 아내 김향안 여사 님 표현은 정확했다.  




아이를 다그치기 전에, ‘나는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었는가?’를 돌아볼 자기성찰력이 없는 엄마는 불행하다. 엄마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아이도 불행하다. 엄마의 무지로 인한 좌충우돌, 그 충격과 상처를 아이가 고스라니 받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라는 돌아봄, 자기인식력이 있는 엄마들은 아이의 거부와 짜증를 마주하면 1) 우선 멈추어 아이를 가만히 관찰한다. 눈앞에 펼쳐진 아이의 행동을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2) 그 행동 뒤에 숨겨진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 아이는 왜 거부하는가? 왜 유난히 쓰기를 힘들어 하는가?’ 3) 아이의 투정과 거부에는 반든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그 어떤 6세 아이도, ‘엄마 엿 먹어 봐요. 엄마가 시키는거 다 거부하고 거절해 볼께요’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렇게 악한 존재가 아니다. 아이는 그냥 영어책이 어려워서, 힘들어서 혹은 재미가 없어서 하기 싫을 뿐이다. 이건 마치 마치 옷가게에 구경을 가서 예쁘길래 몇 개 입어보니 내 몸에는 맞지 않거나 생각보다 예쁘지 않아서 아무것도 사지 않고 그냥 나오는 것과 같다. 무슨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가는 손님 뒤통수에 대고 육두문자를 쓰며 욕하는 상점 주인이 있다면 그건 깡패다. 옷구경 하다가 옷 안 사고 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옷 안산다고 뒤통수에 대고 협박하거나  끝내 옷을 사가도록 만드는 건 강도짓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런 깡패짓을 우리는 수시로 한다. “내가 이 영어책 사왔는데 안 읽어? 내가 이 영어책 좋다고 추천했는데 안 사? 내가 이번 모임 성사를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데 뭐? 모임에 못 나온다고?? 내가 이 엄마표영어 좋다고 그렇게 강연을 하고 다니면서 설득했는데 콧방귀도 안 뀌어?? 너 나 무시해????” 심지어 이것도 있다. “내 카톡을 읽었는데 씹어?” ㅎㅎㅎ 상대가 일이 바빠 혹은 운전중이라 카톡 확인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6세 아이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자기중심적사고의 결과다.  


생각보다 자주, 우리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아이 뒤통수에 대고, 사람들 뒤에 대고 욕을 한다. 그 옷가게 주인의 폭언과 협박 사건 후 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손발이 차가워 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고 몇일 심장이 빨리 뛰는 공포를 느꼈다.  그런데 그 깡패가 어쩌다 옷가게 주인이 아니고 24시간 나와 함께 있는 엄마라면....? 아이가 느낄 공포와 고통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문요한 선생님의 <관계를 읽는 시간>이란 책에서 ‘성숙한 어른’이란 자신을 지키는 마음속 ‘바운더리’를 갖추고 유연하게 문을 열고 닫는다고 설명한다. 누군가가 내 허락도 없이 내 집 문을 덜컥 열고 들어오면 우리는 필사적으로 문을 닫거나 경찰을 부른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남이 내가 정해둔 바운더리, 심리적 경계선을 뛰어넘어 들어왔는데도 거절함으로 나를 보호하지 않는가? 위의 경우처럼 날마다 엄마의 깡패짓에 만신창이가 된 어린이는 그 바운더리의 곙계선이 희미해, 거절해야 할 위험한 순간에도 끌려다니는 미성숙한 인간으로 자란다.


나는 너에게 요구할 수 있고, 너는 거절할 수 있음을, 반대로 너역시 나에게 뭔가를 요구할 수 있고, 나는 사정이 있다면 거절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한 인간관계라고 한다. 그리고 이 거절 또한 연습이 필요한데, 어려서부터 ‘일상’에서 반복 훈련하면 좋다. 책에서 예를 든 것은 ‘아빠랑 같이 분리수거 하러가자’ 였다. “분리수거하러 같이 가자~ 아빠의 요구를 너는 들어줄 수도 있고 또 거절할 권리도 있어. 어떻게 할래?” 아이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의 마음을 한번 더 살핀다. 마음이 내키면 아빠를 따라 나서고, 내키지 않으면 ‘오늘은 밖이 너무 추워 나가기 싫으니 아빠 혼자 다녀오세요’ 라고 정중하게 표현하는 연습을 해보는 것.


어찌보면 육아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연습의 장이다. 엄마가 제안한 ‘날마다 신문스크랩을 하고 요약해서 글쓰기’를 아이는 거절하는 날도 있고, 또 기꺼이 하는 날도 있다. 기꺼이 해주는 날은 엄마도 아이도 기쁘고, 왠지 하기 싫어 버티다 끝내 하지 않은 날도 애를 잡고 혼내고 윽박지를 일은 아니라는 것을, 엄마가 몸소 아이에게 보여주는 것이 참 교육인 것이다. ‘오늘은 아이가 정말 하기 싫었구나’. 하고 말없이 넘기는 것. 손님이 옷 몇가지를 입어보고 끝내 마음에 안 들어 아무것도 사지 않고 가게를 빠져나가도 ‘손님 마음에 드는 옷이 없어던 모양이구나’ 하고 훌훌 털어버리고 말없이 내 할일을 하는 유연함. 그것이 우리가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할 어른의 본보기 일 것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지난 20년간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글쓰기를 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가르친 것은 지력 뿐 아니라 ‘원하지 않는 것을 거절하더라고 그 거절조차 존중받아야’ 하는 중요한 ‘인간됨’ 이었다. 그렇구나.. 넌 참 정말이지.. 감탄을 금할 수가 없구나. 젊은 엄마 시절의 나야, 어린 20대 새댁이었던 나야, 너는 어쩜 그렇게 어린 나이에도 현명하고 따뜻한 엄마였니. 참 잘했다. 참 잘했어.


잘 안되면 연습해보자, 엄마의 제안을 보기좋게 거절하며 사라지는 아이의 뒤통수에 대고, 욕하지 말고 이렇게 말해보자. “안녕히 가세요, 귀여운 꼬마 손님. 다음엔 더 예쁜 옷 준비해 놓을께요. 다음에 또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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