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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달 Apr 07. 2021

애가 답답한건가 엄마가 답답한건가

애 때문에 답답하다면, 그 애는 당신때문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입니다

2021/4/6/화


"8세, 6세, 2세 세 아이 엄마예요. 첫째 둘째 영어 영상 노출한 지 이제 1년 다되어 가는 것 같아요. 책은 소량씩 꾸준히 읽어주고, 리틀팍스 지속적으로 노출해 왔는데, 파닉스를 안하니.... 책도 아직 못 읽고, 너무 답답하더라고요. 오늘 알았습니다. 청독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거였습니다. 내일부터 다시 시작해보려고요!"


아이가 영어책을 못 읽는 것은, 정말로 아이가 영어를 못 읽어서 '못' 읽는 거란 사실을 우리는 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일까. '엄마 너 골탕 좀 먹어봐' 란 심정으로 일부로 '안' 읽는 8세 아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우리는 아이를 째려보고 아이를 미워하는가?


사실 8세 아이가 영어그림책을 유창하게 읽는 것을 기대하려면 지난 세월 적어도 만 3년은 소리 노출하고 영어그림책을 틀어주건 읽어주건, 공들이 시간이 있어야 옳다. 하지만 질문자의 경우는 아이에게 노출한 영어환경은 고작 1년. 그리고 영어영상 노출이라고 해봤자 '리틀팍스'라는 한국에서 제작된 교육용 영어콘텐츠이지 원어민 아이들이 보는 영어만화가 아니다. 그 말은 곧, '영어소리'라고 말하는 그 리틀팍스도 국내에서 영어학습용으로 제작된 소리이기 때문에 질적, 양적 한계가 있다는 소리다.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인풋(input) 이다.


게다가 영어그림책은 '소량씩' 읽어주었다고 말했다. 아이가 읽은 영어그림책의 양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뜻이고, 이는 곧 텍스트와 소리를 매칭해서 들은 경험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하루에 과연 몇분 이었을까? 하루 10분? 10분 남짓의 영어그림책 읽기, 그걸 겨우 1년 했는데 초1 아이가 영어그림책 술술 읽기를 바란다면, 그거야 말로 도둑놈 심보.


우리는 씨앗을 뿌린 적도, 물을 주 적도, 햇살이 잘 비추도록 신경쓴 적도 없으면서 열매가 자라 풍년을 이루길 바란다. 내가 뿌린 씨앗이 턱없이 적다는 사실을, 물을 제대로 준 적 없음을, 그것도 기분 내킬때만 잠깐 줬다가, 한참을 또 방치했다가, 규율이 없었음을. 비바람에 쓰러진 줄기를 막대를 세워 올린 적도 없이 방치했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왜 시들시들 죽어버리는거야? 짜증을 내고 답답해 한다. 또는 왜 이렇게 빨리 안자라지? 묘를 잡아 당기거나, 급한 마음에 비료를 쏟아 붇거나, 물을 쏟아 부어 뿌리를 썩게 만들면서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채, 왜 열매가 안 맺히는거야? 답답해하고 화를 낸다.


그러니 '내가 지금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내가 지금까지 8년동안 아이에게 영어그림책을 읽어주면서 소리 노출한 시간이 '가끔 소량씩' 읽어줬다고 하니, 하루 평균 10분정도 읽어줬다고 계산해도 일주일에 1시간이 채 안되고, 한달이면 4시간, 1년 읽어줬다고 해도 48시간 영어그림책을 읽다 말다 한 셈이다. 그런데 영어책을 술술 읽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냔 말이다. 48시간 러시아어 동화책을 읽었다고, 처음보는 러시아원서를 줄줄 읽을 수 있냐는 말이다.


상상력을 동원하면 쉽게 수긍이 간다. 아, 내가 말도 안되는 욕심을 부리고 있구나. 이걸 깨달으면 영어책을 못 읽는 아이가 한심해 보이지도 않고, 답답하지도 않으며, 화가 치밀지도 않다. 오히려 애쓰는 아이가 고맙고, 서툰 걸음 걸이 하나하나가 귀하다. 그리고 또,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무엇을 했는가. 아이의 영어소리노출을 위해서 내가 꾸준히 해준 것이 있기는 한가? 그리고 중얼거리게 된다. "책 좀 읽어주고 애가 책 읽기를 기대하자, 나야. "


엄마들의 질문을 자주 받지만, 지난 세월, 아이와 엄마 사이에 있었던 정서적, 언어적 자극이나 환경에 대한 정보는 매우 희박하기 때문에 이 엉성한 정보를 가지고 답을 준다는 것이 참 어불성설인 걸 안다. 하지만 질문하는 사람이나 답하는 사람이나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서로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나누어본다. 질문자에게 실시간으로 몇가지 심층질문을 해봄으로써 필요한 정보를 더 받아낼 수 있다면 조금더 현실적인 답변을 줄 수 있으련만...


이 글에서는 몇가지 문장을 통해 몇가지 사실을 가늠해 볼 수 있다.


1.  "영어 영상 노출한 지 이제 1년 다되어 가는데..." 이 말에는 '1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라는 원망이 담겨 있는데, 이는 인간이 한 언어를 습득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반복과 노출량이 차야하는지 모르는 무지에서 오는 원망이다. '이제 겨우 1년인데, 뭘 바라겠습니까."로 마음가짐이 바뀌어야 한다.  


2. 영어책은 소량씩 꾸준히 읽어주고 리틀팍스 지속적으로 노출해 왔는데,...... 소량으론 어림없고, 꾸준히 했는지는 엄마가 표로 그날날 체크하면서 기록하지 전에는 믿기 어렵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했는지는 기억에 의족하면 안되고 철저하게 기록에 의존해야 한다. 인간은 생각보다 허술해서 계획을 아무리 철저히 짜고 실천은 별개이다. 그리고 기록해두지 않으면, 대충 '꾸준히' 지속적으로' 실천했다고 착각하기 일수다. 기억에 의존하지 말고 기록해야 나를 직면할 수 있다. 인증샷을 찍든, 기록을 하든, 실천표를 만들어서 X 표시를 하건, 자신 과연 일주일에 몇번 책을 읽어줬는지를 표시해 볼 것을 권한다. 아마도 깜짝 놀랄꺼다. 그리고 인정할 것이다. 꾸준히, 지속적은 개뿔.


3.  파닉스를 안하니.... 책도 아직 못 읽고, ...... 인과관계가 틀렸다. 파닉스 원리를 안다고 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일본어로 가타가나를 안다고 해서 일본어 원서를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듯, 원서를 읽고 이해하려면 그 원서를 수백권 반복해서 읽어야 가능한 일.


4. 너무 답답하더라고요....... 너무 답답한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아이다. 아니 엄마가 영어그림책 몇번 읽어주셨냐고요. 들어간 인풋 양도 턱없이 부족한데, 왜 책을 못읽어? 바보야?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엄마 앞에서 아이가 느낄 공포과 좌절의 크기가 가늠이 되질 않는다. '내가 정말 바본가?' 란 생각이 들게 만드는 엄마의 못마땅한 시선과 짜증을, 영문도 모르고 견뎌야 할 아이가 미치고 팔짝 뛸 당사자이다.


"애 때문에 힘들어요. 남편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하소연 하는 엄마들을 볼 때면 씁쓸한 생각이 든다. 이들의 말 속에는 "나는 그들을 힘들게 할 리가 없어요. 난 완벽한 인간인데, 그들은 모자란 인간이라 날 이렇게 힘들게 하네요" 가 담겨 있다. 내 아이가, 내 남편이, 다름아닌 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 할꺼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는 무지. 그것이 자기 자신과 가족 모두를 힘들게 한다. 제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키우시길. 그것이 나와 너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안아줄 너그러움을, 온화함을 가져다 줄 것이므로.




오늘부터 말을 이렇게 바꿔보자

before : 애 때문에 미치겠네. 속터지네. 답답해 죽겠네.   

after : 내가 애때문에 답답하면, 애는 나때문에 미치고 팔짝 뛸 것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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