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느린 아이, 감정이 느린 엄마

7장 엄마와 나, 그리고 율이

by 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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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아 때의 기억

조리원을 나와 친정에서 한 달을 머물렀다.

그때 밤에 율이를 재워준 사람은 나의 엄마였다.

신생아 율이가 깊은 밤에 울 때마다 외할머니가 일어나 품에 안고 달래주셨다.

"괜찮아, 할머니가 있어."

그 따뜻한 품과 목소리가 율이의 첫 번째 기억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 같다.

지금 37개월이 된 율이에게 외할머니는 특별한 존재다.

매일 보지는 못하지만 외할머니가 오시는 날이면 율이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진다.

문 열리는 소리만 들어도 "엄마!"라고 외치며 달려간다.

그래서 내 친구들이 놀린다. "율이 찐엄마는 다른 데 살고 집에선 이모랑 사는 줄 아는 거 아냐?"

외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율이를 보며 친구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글자 병풍의 비밀

외할머니는 올 때마다 율이를 위한 무언가를 가져오신다.

과자, 장난감, 간식거리... 항상 손에 뭔가 들고 오신다.

율이는 그걸 안다.

외할머니가 오시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외할머니 가방이나 손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거 뭐야?"라고 물어볼 줄은 안다. 하지만 외할머니가 가져온 글자 병풍을 콕콕 손으로 집으며 확인한다.

글자도 읽지 못하고 말도 느리지만 외할머니의 패턴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외할머니가 오시면 율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외할머니 잠바를 잡아당기며 벗으라고 손짓하고

가방을 가리키며 지정된 자리에 두라고 재촉한다.

빨리 편하게 하셔서 오래 계시라는 뜻인 것 같다.

외할머니가 코트를 벗지 않고 있으면 율이는 계속 잡아당기며 재촉한다.


낮잠 버티기 작전

평소 낮잠을 잘 자는 율이지만 외할머니가 오신 날은 다르다.

"율이야, 낮잠 자자."

고개를 젓는다. 외할머니가 가실까 봐 걱정인 것 같다.

외할머니가 "할머니 안 가, 자고 일어나도 있어" 라고 약속해도 믿지 않는다.

결국 외할머니가 정말 갈 때까지 끝까지 버틴다.

눈이 감겨와도 꾹 참는다.

"율이가 말이 왜 이렇게 안 나오지?"

외할머니가 가끔 걱정스럽게 말씀하신다.

"또래 아이들은 다 말을 잘 하던데... 우리 율이만 유독 늦는 것 같아."

사랑하는 손자가 걱정되는 마음이다.

"병원은 갔어? 검사는 해봤어?" 계속 물어보신다.

"엄마, 점점 트이고 있으니까 좀 더 기다려봐."

나는 엄마를 달래곤 한다.

"언어센터도 다니고 있고, 선생님도 조금씩 늘고 있다고 해."

하지만 외할머니의 걱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같은 또래 아이들과 비교하게 되고, 조바심이 나는 것도 이해한다.


율이는 정말 똑똑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율이가 얼마나 똑똑한지를.

말은 느려도 이해력은 뛰어나다. 상황 파악도 빠르고 기억력도 좋다.

외할머니가 뭘 가져오는지 체크하고, 빨리 정착하라고 재촉하고, 낮잠 시간을 계산해서 버티는 모습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단지 표현 방식이 말이 아닐 뿐이다.

엄마 세대에게는 "말 빨리 하기"가 중요한 발달 지표였다.

"우리 때는 다 빨랐는데..." "말 늦으면 나중에 공부도 못 해..."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시대가 다르다는 걸 설명하기는 어렵다.

지금은 아이 개개인의 발달 속도를 존중하는 시대라는 걸.

외할머니와 율이 사이에서 나는 중재자 역할을 한다.

외할머니에게는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하고, 율이에게는 "할머니가 걱정되시는 거야"라고 한다.

둘 다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은데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변하지 않는 사랑

그래도 변하지 않는 건 서로를 향한 사랑이다.

외할머니는 율이가 말이 늦어도 오실 때마다 뭔가 가져오신다.

율이는 말로 표현하지 못해도 온몸으로 외할머니를 반긴다.

그 사랑은 말보다 더 분명하다.

최근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

외할머니가 가려고 하시자 율이가 "할무~"라고 말했다.

그리고 외할머니 손을 꼭 잡으며 깍지를 끼었다.

"안 가" 대신 "할무~"라고 부르며 손을 놓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깜짝 놀라며 "어머, 우리 율이가 할머니라고 했네!" 하고 기뻐하셨다.

말은 느려도 마음은 빠른 아이, 걱정은 많아도 사랑은 더 많은 외할머니,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나.

우리 셋의 속도는 다르지만 향하는 방향은 같다.

율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행복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

오늘도 외할머니가 오시면 율이는 글자 병풍을 확인하고 잠바를 벗으라고 재촉할 것이다.

그리고 낮잠 시간에는 끝까지 버틸 것이다.

그 모든 행동 속에 외할머니를 향한 사랑이 담겨 있다.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지만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크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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