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주세요 싫어하는 아이의 마음
"아빠는 어디갔지?"
18개월 율이가 완전한 문장으로 물었다.
그때만 해도 율이는 말을 참 잘했다. 어른들이 시키는 말도 잘 따라했고, 문장으로 의사표현도 제법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심했었다. '우리 율이는 언어 발달이 빠르네.'
그 무렵부터 시작됐다. 율이에게 예의를 가르치려는 시도가.
"율이야, 과자 받을 때 뭐라고 해야 할까?" "주세요~"
손짓까지 가르쳐줬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며 "주세요~" 하는 동작까지.
뭔가 줄 때마다 "주세요 해", "이거 주세요 해~" 계속 반복했다.
율이는 처음에는 잘 따라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율이가 "주세요"를 하기 싫어하기 시작한 건.
"율이야, 우유 주세요 해봐." 고개를 젓는다.
"주세요 안 하면 안 줘." 그럼 율이는 아예 돌아선다.
어른들이 시키는 다른 말들도 점점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0개월이 흘렀다.
18개월에 "아빠는 어디갔지?"라고 문장으로 말하던 아이가 28개월이 되어서는 단어만 말했다.
"물", "과자", "엄마", "아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골라서 했다. 어른이 시키는 말은 절대 안 했다.
특히 "주세요"는 금기어가 되었다.
"율이가 언어 발달이 늦는 것 같아서요."
결국 언어센터를 찾았다.
"어떤 부분이 걱정이세요?"
"예전에는 문장도 말했는데 지금은 단어만 말해요. 그리고 시키는 말을 안 해요."
"언제부터 그랬나요?"
18개월 이후의 변화를 설명했다.
"아마 과도한 교정이 원인일 수 있어요."
선생님의 조심스러운 진단이었다.
"아이가 자연스럽게 말하려는 것보다 어른들이 원하는 형식을 강요받다 보니 말하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꼈을 거예요."
생각해보니 이해가 됐다.
율이에게 "주세요"는 즐거운 소통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과제였다.
뭔가 받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였던 것이다.
그래서 아예 거부하기로 한 거였다.
언어치료가 시작됐다. 선생님은 "주세요"를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율이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자유롭게 하도록 도왔다.
"율이야, 뭐 하고 싶어?" "공룡!" "공룡 좋아하는구나."
압박 없는 대화였다.
어느 날 율이가 "주세요~" 하는 걸 또 싫어하는 모습을 보고 안아주면서 물었다.
"율이야, 주세요~하면 괴롭히는 거 같아?"
율이가 "응~"이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내가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이 율이에게는 괴롭힘이었다니.
나도 방식을 바꿨다.
율이가 "물"이라고 하면 "물 마시고 싶구나" 하며 바로 줬다.
"주세요 해야지" 같은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율이 옆에서 자연스럽게 말을 많이 했다. 놀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강제로 시키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언어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몇 주가 지나자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
"엄마, 물." 나를 부르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공룡 봐!" 명령형이 아닌 요청형으로 말했다.
"주세요"는 여전히 안 했지만 소통하려는 의지가 돌아왔다.
지금 율이는 자연스럽게 말한다.
"엄마, 이거 줘." "아빠, 같이 놀자." "공룡 보고 싶어."
"주세요"라는 단어는 쓰지 않지만 충분히 예의 바른 요청을 한다.
18개월 때의 율이로 돌아갔다. 자연스럽게 말하고 소통하는 아이로.
그 과정에서 깨달은 건 어른의 욕심이 아이의 자연스러운 발달을 얼마나 방해할 수 있는지였다.
언어의 목적은 소통이다. 예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율이는 "주세요" 없이도 충분히 예의 바르고 사랑스럽게 소통한다.
요즘 율이가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엄마, 안아줘." "아빠, 도와줘."
"줘"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쓴다. 억지로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아이는 스스로 배워간다. 어른이 조급해하지 않으면.
오늘도 율이는 "엄마, 같이 놀자!"라고 말하며 내 손을 잡아끈다.
그 작은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이 그 어떤 완벽한 문장보다 소중하다.
10개월 동안 잃어버렸던 율이의 자연스러운 소통이 다시 돌아와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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